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치명적인 유혹? 행복감과 대리만족의 원천? 만병의 근원인 비만이 범죄라면 ‘먹방’은 유죄일까. 정부가 끼어든 ‘먹방 규제’를 두고 논란과 의견이 여전히 분분하다. 이 소동이 어떤 결론으로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음식을 만들고 먹는 행위가 인간 생존의 필수 조건이자 원초적 욕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최근 10년 새 음식을 만들고 먹는 행위를 다룬 ‘먹방’이 급증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같은 소재는 오랫동안 방송가에서 사용돼 왔다. 시대와 사회 변화에 따라 다양한 변주와 진화를 거듭해 왔을 뿐이다. 



현모양처가 되는 법 


음식을 소재로 한 방송의 초기 모델은 1980년대 초반 나온 주부 대상 요리 프로그램이다. 당시 양대 지상파이던 MBC의 <오늘의 요리>, KBS의 <가정요리>다. 지금처럼 먹고 즐기는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밥상을 책임지는 주부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교육적 성격이 짙었다. 요리를 설명하는 전문가, 그리고 유명 배우가 함께 출연했지만 프로그램의 분위기는 내내 차분하고 조신했다.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여성의 과제이자 미덕이던 당시 사회 분위기가 방송에 그대로 반영돼 있었다. 출연자들은 모두 여성이었으며 방송시간대는 남편을 출근시킨 뒤 편하게 볼 수 있는 오전 9시30분 정도였다. 진행자로 김영란, 고두심, 유지인, 선우은숙, 이휘향 등이 출연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당대 여성 스타의 관문으로도 각광받았다. 


오늘의 요리 오른쪽이 배우 선우은숙



1990년대 이후에도 한동안 요리와 음식은 여전히 ‘교양’의 영역이었다. 주부를 대상으로 한 오전 생활정보 프로그램이나 오후에 방송되는 <6시 내고향>(KBS)과 같은 류의 프로그램들은 산지 중심의 음식 정보, 혹은 건강에 도움이 되는 제철 음식을 주로 소개했다. 영양 전문가나 의사가 출연해 음식 섭취를 통한 건강상식을 알려주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엔터테인먼트 소재가 되다 


요리가 예능의 소재로 등장했던 프로그램은 1990년대 중반 SBS에서 선보인 <이홍렬쇼>다. ‘참참참’이라는 코너를 통해 진행자 이홍렬은 게스트와 함께 음식을 만들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퀴즈를 풀었다. 요리를 하며푸근하고 진솔한 분위기가 더해졌던 이 코너는 재미와 신선함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 물론 이때 음식이나 요리가 프로그램의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다. 게스트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을 돕는 보조적인 수단이었지만 요리가 예능의 요소가 되는 수많은 먹방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요리=여성의 영역, 요리=아침방송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것도 이 프로그램이다. 주부가 아닌 온 가족을 대상으로 하고, 늦은 밤 시간에 식욕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당시에도 화제가 됐다.


맛있는 녀석들 /정지윤 기자



비슷한 시기 MBC도 간판 예능인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요리천하’ 코너를 만들었다. 개그맨 임하룡이 요리의 대가들과 경쟁을 벌인다는 콘셉트로, 요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비전문가가 요리 전문가와 대결을 벌인다는 의미에서 <무한도전>과 같은 취지를 가진 프로그램이자 요리 대결을 한다는 점에서 서바이벌의 원형이었던 셈이다. 




맛집을 찾아라 


음식 자체가 주인공이 된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다. 맛있는 음식, 그리고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으려는 욕구와 관심. 일명 ‘맛집’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들이 본격화됐다. <찾아라 맛있는 TV>(MBC) <VJ 특공대>(KBS) 등을 통해 소개된 식당들은 전국구 유명세를 떨쳤다. 이 같은 프로그램은 맛집 정보를 알려준다는 취지도 있었지만 강렬한 시각적 유혹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강탈했다. 소문난 맛집에 차려진 먹음직스러운 음식, 군침이 꿀꺽 넘어갈 만큼 맛있게 먹는 모습이 클로즈업된 화면에서 눈을 떼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찾아라 맛있는 TV /경향신문 자료사진



맛집 프로그램은 상업적 의도가 끼어들면서 한때 부작용이 일기도 했지만 세련되고 다양한 형태로 성장했다. <테이스티 로드>(올리브) <식신원정대>(MBC에브리원) <수요미식회>(tvN) 등은 전국 각지의 맛집을 찾아 나섰고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원나잇 푸드 트립>처럼 해외의 맛집과 문화를 탐방하는 프로그램까지 나왔다.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개그맨 이영자가 소개한 음식점은 방송 직후 문전성시를 이룬다. 인터넷에서는 특정 방송에서 소개된 맛집 리스트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외식과 여행이 일상화되면서 ‘맛집’을 찾기 위한 대중들의 집념과 호기심은 앞으로도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맛집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밥 블레스 유



‘먹방’ 품은 콘텐츠 


드라마도 요리나 음식을 주요한 소재로 활용해 왔다. 한 드라마 제작 관계자는 “의학과 음식은 드라마에서 가장 자주 다루는 소재”라면서 “제작진 입장에서는 볼거리를 풍성히 만들어낼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되고, 시청자들 입장에선 오감을 만족시키는 볼거리가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많은 음식 드라마들은 매번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새로운 직업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등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 수라간을 배경으로 한 <대장금>(MBC)은 국내 드라마 역사상 손꼽히는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해외 시장에서도 인지도가 높다. 파티셰라는 신개념을 소개하면서 화려한 디저트로 시선을 사로잡았던 <내 이름은 김삼순>(MBC), 커피와 바리스타 열풍을 몰고 왔던 <커피 프린스 1호점>(MBC)도 빼놓을 수 없다. 이후에도 <파스타>(MBC) <오 나의 귀신님>(tvN) <제빵왕 김탁구>(KBS) <식객> (SBS)에 이어 현재 방송 중인 <식샤를 합시다>(tvN)에 이르기까지 음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드라마는 꾸준히 나오고 있다. 




<1박2일>(KBS) <런닝맨>(SBS) 등의 예능프로그램도 재미의 상당 부분을 ‘먹방’에 기대고 있다. 게임을 통해 승자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패자는 그 장면을 지켜보는 벌칙을 수행하는 것은 예능 서사의 틀이 된 지 오래다. 



먹방의 변주 


최근 몇 년간 ‘먹방’은 세분화되어 발전했다. 긴장감 넘치는 대결을 펼치는 서바이벌 형태가 있는가 하면 말 그대로 먹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되는 먹방, 요리법을 가르쳐주는 쿡방, 음식을 매개로 다양한 이슈와 화제를 다루는 토크쇼 등이 있다. 2000년대 초반 방송됐던 <결정 맛 대 맛>(SBS)은 본격적인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시작이었다. 이후 음식 전문 채널 올리브에서 방송한 <마스터 셰프 코리아> <한식대첩> 등은 요리 대결의 새로운 포맷을 만들었으며, 현재 방송 중인 <냉장고를 부탁해>(JTBC)로 이어졌다. 


집밥 백선생 /tvn 제공



누군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대리만족을 얻게 되는, 협의의 ‘먹방’은 인터넷 방송인 아프리카TV가 진원지다. 유튜브를 통해 확산되고 입소문이 나면서 이는 지상파나 케이블에서 음식 관련 프로그램이 쏟아지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삼시세끼> <윤식당>(tvN) <맛있는 녀석들>(코미디TV)과 같은 형태의 프로그램은 제도권으로 옮겨온 ‘먹방’인 셈이다. 


2015년 MBC에서 방송됐던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요리 방송, 즉 ‘쿡방’ 붐을 일으켰다. 그 중심에는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있다. 그가 선보인 쿡방은 요리는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인식을 만들며 문턱을 대폭 낮춘 동시에 정보와 재미도 충족시켰다. <집밥 백선생>(tvN) <오늘 뭐 먹지>(올리브) 등은 ‘요섹남’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냈다. 


이홍렬 쇼



요리와 음식을 매개로 한 토크쇼는 <이홍렬쇼> 이후 <해피투게더>의 ‘야간매점’(KBS) 등을 거쳐 현재 방송 중인 <밥 블레스 유>(올리브)에까지 이르고 있다. 현재 ‘먹방’을 장악한 사람들이 대부분 남성이라면 <밥 블레스 유>는 드물게 여성 출연자들로만 구성돼 있다. 예능적 재미를 잃지 않으면서 젠더 이슈와 같은 사회적 사안들도 녹여내고 있어 호평을 받고 있다.



먹방이 만든 스타들 


‘셰프테이너’는 먹방시대가 만든 신조어다. 셰프와 엔터테이너의 합성어다. 최현석, 오세득, 샘킴, 이연복, 레이먼킴, 강레오 등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셰프테이너들이다. 전문적인 영역을 보완하는 데 머물던 셰프들은 <올리브쇼>(올리브) <냉장고를 부탁해>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셰프의, 셰프에 의한, 셰프를 위한 방송영역을 만들어냈다. 최현석 셰프는 <정글의 법칙>과 같은 정통 예능프로그램에까지 출연하며 전문방송인으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있다.




맛있게 먹는 장면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얻으며 스타덤에 오른 이들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아역스타 윤후와 추사랑을 꼽을 수 있다. <아빠 어디가>(MBC)와 <슈퍼맨이 돌아왔다>(KBS)에서 보여준 이들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모습은 많은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다. 개그맨 이영자는 시청각을 동원한 음식 묘사가 곁들여진 먹방을 선보이면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먹방이 많은 스타를 만들었다면, 먹방을 대중적 히트상품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이는 배우 하정우다. 누군가가 먹는 장면을 보는 것으로 재미와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먹방의 본질이라면, 하정우의 먹방은 먹방의 대명사이자 기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범죄와의 전쟁>에서 탕수육을 먹는 장면, <황해>에서 김·핫바 따위를 먹는 장면들은 움짤(편집된 동영상)로 만들어져 지금도 유통되며 ‘먹방의 레전드’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