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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과 탐식

우리는 지금 제주 원도심으로 간다

by 신사임당 2017. 9. 8.

 

 

 

‘수화식당 미래책방’. 나란히 붙어 있는 두개의 간판. 이곳은 식당일까, 책방일까. 입구 옆 벽면에는 큼직하게 ‘쌀’이라고 씌여 있고 문 위에는 ‘커피’라고 표시되어 있는 이곳의 정체는 뭘까.

우리는 지금 제주 '원도심'으로 간다

전자는 책방이고 후자는 카페. 제주시 삼도동에 있는 가게들이다. 원래 식당이고 쌀집이었던 간판을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이름을 덧붙였다. 외관에서 풍기는 자신감과 감각만큼이나 알찬 책방, 맛있는 커피집으로 입소문이 났다. 

제주 원도심(일도동, 이도동, 삼도동 일대)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개성 넘치는 공간들과 문화가 있고 이야깃거리가 있어서다. 제주 사람들의 ‘진짜 삶’도 만날 수 있다. 그동안 제주 여행객에게 원도심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쇼핑을 위해 주로 찾는 동문시장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하지만 요 근래는 좀 달라졌다. ‘뭘 좀 아는’ 여행객들이라면 이곳으로 향한다.

■문화가 모여드는 곳 

독창적인 컨셉트를 가진 서점, 수준 높은 미술관, 아기자기한 공방과 전시장, 감각적인 카페와 맛집까지 즐비하다. 앞서 언급한 미래책방을 비롯해 ‘라이킷’ ‘딜다책방’ ‘에이팩토리 커피앤북스’ ‘책+방 서사라’ 등은 매력 넘치는 동네 책방이다.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서점에서는 찾기 힘든 독립출판물을 비롯해 제주에 관한 책, 여행지에서 읽기 좋은 가볍고 따뜻한 책들이 많다. 주인장들이 나름의 취향과 안목을 갖고 골라놓은 책들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제주 '원도심'으로 간다

칠성로에 있는 ‘라이킷’은 입구 유리창에 ‘빵 안 팔아요’라고 써붙여 놨다. 책방을 소리나는대로 읽다보면 ‘책빵’이라고 발음되는데 실제로 들어와서는 ‘빵도 파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란다. 들어서자마다 오른편 서가에서 눈에 띄는 책은 ‘제주의 다정한 동네 빵집’을 비롯해 각양 각색의 제주 관련 책들이다. ‘딜다책방’은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그림책들이 많은 곳이다.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 건너편에 있는 에이팩토리 커피앤북스는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으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 아라리오 뮤지엄의 도록도 구비돼 있다. 

2014년 탑동 일대에 들어선 아라리오 뮤지엄은 명물이 된지 오래다. 영화관, 모텔, 자전거포였던 낡은 건물을 미술관으로 꾸몄다. 건물을 헐어낸 것이 아니라 멋스럽게 재활용했다. 세계 100대 컬렉터에 선정된 김창일 회장이 35년간 수집한 작품을 바탕으로 유명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9월 한달간 요절한 천재 조각가 구본주 추모전과 김태호 작가의 개인전도 열린다.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

구본주 작가의 작품  ‘디 엔드’

구본주 작가의 작품 ‘디 엔드’

예술지원센터(예술공간 이아)로 변신한 옛 제주병원 주변에는 실험적인 문화공간들이 있다. 문화예술공간 오이, 그림책 갤러리 제라진, 노후창고를 리모델링해 변신시킨 갤러리 둘하나, 지역주민을 위한 음악공간으로 확장된 이디올래카페 등이다. 

크림공작소

크림공작소 

이시돌목장의 유기농 우유로 만드는 아이스크림과 디저트를 파는 ‘크림공작소’, 무국적 음식점이자 펍인 ‘비스트로 더 반’, 세련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풍류’, 눈을 부릅떠야 찾을 수 있을만큼 작은 카페 ‘컴플렉스 커피’도 소문난 맛집들이다. 풍류 2층의 옷가게는 최근 이효리가 찾으면서 알려졌고 근처의 ‘모퉁이 옷장’은 외벽의 예쁜 색감 때문에 셀피족을 불러 모은다.

비스트로 더반

비스트로 더반 

모퉁이 옷장

모퉁이 옷장 

■골목길 마다 숨은 역사 

제주 해안선을 따라서만 올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역사와 숨은 이야기를 간직한 원도심 올레도 걸어볼 만하다. 특히 ‘한짓골’이라 불리는 제주성안 옛길은 지금의 중앙로가 생기기 전에 제주 시내의 남과 북을 잇는 가장 큰 길이었다. 예로부터 행정, 경제, 사회, 문화, 역사, 교육의 중심지이자 제주민의 자부심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성내교회

성내교회

현대극장

현대극장 

주요 건물들 역시 제주에서 최초로 세워진 기록들을 갖고 있다. 수원교구에 있던 페네 신부가 제주로 와서 지은 중앙성당, 이기풍 선교사가 1910년 설립한 성내교회가 그렇다. 지금은 안전등급 때문에 사용이 중지된 현대극장 역시 제주 최초의 영화관이다. 

20세기 초반에 들어선 주택과 건물들 틈에 꿋꿋이 자리잡고 있는 초가집도 있다. 이른바 ‘박씨초가’로 불리는 300년된 주택으로, 현재 7대째가 살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박영수 특검의 조상 대대로 살던 집”이라고 귀띔했다. 상권이 약화되면서 많은 가게가 원도심을 떠났지만 수십년씩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색창연한 서점 우생당, 문구점 인천문화당은 지역 주민들에게 추억을 환기시키는 곳들이다. 

박씨초가

박씨초가 

우리는 지금 제주 '원도심'으로 간다

■원도심을 추억하는 사람들 

원도심이 최근 몇년새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문화예술인들과 관련 공간들이 모여들면서다. 본격적인 물꼬가 터진 것은 대동호텔 1층에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통하는 갤러리 비아아트가 생기면서다. 원도심에서 나고 자란 박은희 대표는 20년 넘게 고향을 떠나 있다 돌아왔다. 미술사를 공부한 그는 “예술가들이 편하게 모이고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뭔가 재미있는 일을 펼쳐보고 싶었던 그는 지인들, 동료들과 함께 2014년 제주에서 처음으로 아트페어를 기획해 개최했다. “문화예술인들이 제주도에 그렇게 많이 내려왔다고 하는데 다들 어디 있는지 궁금했다”는 점도 이유가 됐다. 대동호텔을 비롯해 이 호텔과 같은 골목에 자리잡은 게스트하우스와 여관들이 전시장이 됐고 카페와 잡화점, 식당 등 동네 가게들도 경품을 제공하며 동네 축제를 위해 팔을 걷어 부쳤다. 청년작가들을 위한 공모전도 개최하는 등 매년 조금씩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올 10월이면 4회째를 맞는다. 

샛물골에 있는 대동호텔 1층에 자리잡은 비아아트.

샛물골에 있는 대동호텔 1층에 자리잡은 비아아트. 

아트페어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도심 문화행사들도 생겨났다. 또 예술공간 이아 건립, 삼도동 문화의 거리 조성 등 정부기관과 지자체의 지원이 이어지면서 문화적 자원도 모여들고 있는 추세다. 박은희 대표는 “요 몇년새 원도심으로 찾아드는 사람들은 그동안의 개발 행태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면서 “멀쩡한 자연경관을 해치고 무언가를 짓는 것이 아니라 원래 사람들이 살고 있던 마을을 찾아 건강하게 소통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도청은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도심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환경을 개선하는 도심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도심재생지원센터 이재근 사무국장은 “젠트리피케이션과 같은 부작용을 낳는 재생사업이 아니라 주민들이 적극 참여해서 삶의 터전을 개선하고 활기를 찾는 것이 사업의 가장 중요한 방향”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