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대가’. 얼마 전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 있는 제목이 눈길을 잡아 끌었다. 클릭해 보니 <갈색 아침>이라는 신간에 대한 짤막한 서평이다. 갈색만 허용되는 나라에서 벌어지는 황당하고 말도 안되는 일들. 그런 일들을 보고 침묵한 대가로 개인들이 맞이하게 된 비극. 호기심에 서점으로 달려갔다. 예상과 달리 직원은 어린이책 서가로 안내해줬다. 내용은 이렇다. 새로 생긴 법에 따라 갈색이 아닌 개와 고양이는 모두 죽여야 한다. 이상하긴 하지만 “고양이와 개가 너무 많아져서”라는 정부의 설명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따른다. 그런데 정부의 대책을 비판한 신문 ‘거리일보’가 폐간된다. 세상에는 정부를 지지하는 ‘갈색신문’만 남는다. ‘갈색’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책은 도서관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고양이, 생쥐, 커피 등 모든 단어에 ‘갈색’이라는 단어를 붙여 사용한다. 갈색이 아닌 것은 말할 수도, 관심을 가질 수도 없다. 세상이 온통 갈색투성이가 됐는데도 끝나지 않는다. 정부는 과거에 갈색이 아닌 개나 고양이를 기른 사람들도 처벌하기 시작한다. 부모, 형제, 친척 중에서 한 명이라도, 한 번이라도 갈색이 아닌 고양이나 개를 기른 적이 있다면 가족 모두 처벌 대상이다. ‘갈색 법’을 지키고 따르기만 하면 편하게 살 줄 알았던 세상에선 믿을 수 없고, 끔찍하고, 꿈에도 몰랐던 일들이 계속 생겨난다. 그동안 뭔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살아온 주인공은 그제서야 “우리가 어리석었다”고 가슴을 친다.
2002년 프랑스 대선 당시 극우파 후보이던 장 마리 르펜의 낙선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이 책은 프랑스 작가 프랑크 파블로프가 1998년 발표한 작품이다. 갈색만 허용되고, 갈색 아닌 모든 것은 처벌 대상이 되는 상황.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나. 마치 2013년 한국의 현실을 맞대놓고 쓴 듯한 이 책은 둔중한 망치가 돼 머리를 쳤다. “그들이 처음 갈색 법을 만들었을 때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눈치챘어야 해요. 그때 그들에게 맞서야 했어요. 하지만 어떻게요? 해야 할 일도 많고, 걱정거리도 산더미같은데. 나만 침묵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요.” 주인공의 울부짖음은 날카로운 송곳이 돼 가슴을 찔렀다.
나의, 우리 세대의 모습이 이 같은 외침 위로 겹쳐졌다. 피 말리는 스펙전쟁, 기약없는 취업난을 겪고 있는 후배들이 안타깝긴 했지만 그만큼 마음 깊은 곳에선 ‘우리가 복받은 세대였다’는 비겁한 안도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이태백이니 88세대니 3포세대니 하는 자조 속에 시들어가는 청춘들을 보며 ‘안됐지만 어쩌나’ 하는 무력감으로 외면하지 않았던가. 부자가 되겠다며, 내 아이만 잘되면 된다는 욕망으로 사는 데 급급해 달려오지 않았던가. 세상이 이상하게 꼬여간다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나와 내 가족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모른 척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살면서 가끔씩 모여 앉은 술자리에서 안줏거리 삼아 늘어놓았던 민주주의와 정의. 우리가 입에 올렸던 그 단어에 뜨거운 피와 생기가 돌기나 했던 걸까. “나치가 유대인을 잡아갈 때/ 나는 유대인이 아니어서 모른 체했고, 나치가 가톨릭을 박해할 때/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서 모른 체했고 … 그들이 막상 내 집 문 앞에 들이닥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책 말미 추천사에 실린 마르틴 니묄러의 시는 마치 뒤통수라도 가격당한 듯 나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지난 주말, 1주일을 버티는 힘이 되고 있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보고 있는데 문득 그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민주화 이후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에 들어가 더 만개할 민주주의에 대해 희망을 품던 시절.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국민소득이 늘어나면서 장밋빛 내일을 꿈꾸던 시절. 함께 행복하고 공존하는 미래를 만들어보겠다며 세상을 향해 열정을 꽃피우던 시절.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많은 질문을 머금고 나를 바라보는 그 시절의 나에게 현재의 나는 무엇을 대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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