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광화문 근처의 대형 서점을 찾았다. 필요한 책 몇권을 고르고 난 뒤 습관처럼 중앙통로의 베스트셀러 코너로 향했다. 대형 작가의 신작 소설을 제외하고는 몇달 전과 비슷했다. 소위 ‘힐링 서적’들이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괜찮다’며 다독이는 위안의 메시지, 생활을 되돌아보게 하는 잠언 등을 담은 책들은 화사한 표정으로 지친 이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또 다른 쪽에 놓인 ‘셀프 힐링’ ‘독서 힐링캠프’라는 이름의 서가도 손님을 맞고 있었다. 아직도 힐링 타령인가 싶어 시큰둥한 표정으로 진열된 책을 들춰보는데 옆에 있던 젊은 커플 한쌍이 내 맘을 읽기라도 한 듯 불평을 내뱉는다. “이런 거 읽는다고 뭐가 달라져. 88만원 받아도 닥치고 만족하며 살라는 거 아냐?” “그래도 계속 사 보니까 나오는 거겠지”.
어디 출판가뿐인가. 몇년 전부터 패션, 음식, 화장품, 문화상품, 여행 등 온갖 상품에서 라이프스타일까지 장악한 키워드 ‘힐링’은 여전히 트렌드를 주도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지난달 휴가로 다녀왔던 제주도는 청정자연을 내세운 힐링의 성지로 불리지만 힐링하겠다며 찾아 온 인파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치유라는 의미를 가진 이 단어만 나오면 괜한 심술을 부리거나 어깃장이 놓고 싶어졌다. ‘다 잘될 거다’, ‘너만 그런 게 아니다’라며 위로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본질은 풀빵 장사하며 죽도록 노력해 대통령까지 됐다는 식의 생기없는 성공신화의 또 다른 모습같았기 때문이다.
몸이 녹아나도록 일해도 늘 신산한 살림살이, 죽어라 달려도 제자리인 절망스러운 현실. 이를 버텨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힐링이 절실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다가서는 힐링의 모습은 어떤가. 밑도 끝도 없이 강요되는 긍정적 마인드이거나 대안없이 부추기는 막연한 기대감, 혹은 천박한 물신주의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상처가 사회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상당한데도 개인의 문제로 주저앉히며 참고 버텨보란다. 치유가 아닌 도피다. 문제의 근원을 외면한 사기극이다. 여기에 정치인을 비롯한 기득권층, 유명인사들이 멘토라는 이름표를 달고 너나 할 것 없이 가세한다.
혼자 부글부글 끓어 오르던 짜증은 유치하고 지질한 개인적 화풀이로 이어졌다. 물건을 살 때나 식당, 카페에서 주문을 할 때 ‘힐링’이 들어간 메뉴나 제품은 주문하지 않는 식 말이다. 애꿎은 종업원에게 ‘도대체 뭐가 힐링이 되는 거냐’고 캐묻기도 했다.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에서 내 ‘쪼잔함’은 극을 달렸다. 최근에 샀다는 명품백과 책 몇권을 ‘연출’한 사진을 올려놓고는 ‘힐링이 필요해’라고 대문글을 달아놓은 친구에게 ‘너같은 된장녀 때문에 힐링이 피곤해’라고 악플을 남기는가 하면, 역시 힐링 타령을 하며 외국 리조트에서 찍은 비키니차림의 사진 여러장을 올려놓은 지인과 친구관계를 끊어버리는 과격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졸지에 된장녀가 됐던 그 친구에게서 얼마전 “힐링 피로는 해결됐느냐”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 친구는 ○○하는 사람의 몇가지 습관 시리즈를 비롯해 재테크, 아침형 인간, ○○콘서트, 정의, 인문학, 안철수에 이르기까지 십수년간 출판계를 관통했던 키워드는 모두 꿰며 관련책을 섭렵해 왔다. 힐링도 예외는 아닐 터.
“책에서 길을 찾았느냐”고 묻자 친구에게선 “이젠 장사꾼들의 기획력에 감동받지 않기로 했다”는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온다. 대신 찾은 것이 천명관의 소설이란다. 어처구니없는 비루한 막장 인생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삶을 이겨내고 해답을 찾아가는 방식이 경쾌하고 생산적이기 때문이란다.
천명관의 소설을 본적이 없던 나는 “비루한 인간 군상 나오기로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도 못지 않은데, 요즘 같은 시대에 특히 와 닿는다”고 했더니 그 친구 목소리가 살짝 높아진다.
“그래? 맞아. 애랑 같이 읽으려면 고전이 딱인데. 그런 거 몇개만 추천해줘봐. 학업에 지친 청소년을 위한 힐링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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