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모슬포 섯알오름 학살터 전경. 미군의 폭격으로 오름이 함몰되면서 만들어진 구덩이에서 학살이 이뤄졌다. 1950년 7월 16일과 8월 20일 두 차례에 걸쳐 집단학살이 발생했다. 현지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한 사람이 한 명씩 총살하라’는 중대장의 명령에 대원들이 일렬종대로 대기하고 있다가 트럭에서 내리는 민간인을 이곳 호 가장자리로 끌고와서 한 명씩 세워놓고 지휘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해 시신을 호 안으로 떨어지게 한 장소이다”라고 쓰여 있다 / 정지윤기자

 

짙푸른 바다에 기댄 마을. 구석구석을 감싼 나지막한 검은 돌담 아래 노란 빛이 감도는 선인장 위로 봄볕이 내려앉았다. 제주 서쪽에 자리잡은 월령리다. 국내 유일의 선인장 자생지라는 이곳(올레 14코스)은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풍광 덕분에 일찍이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이 머물던 곳이다. 최근엔 예능 프로그램 <강식당> 촬영지로도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제주는 수많은 이들에게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곳이다. 공항의 활기, 후덥지근한 공기, 유채꽃으로 뒤덮인 들판과 신선한 숲, 풍성하고 입맛 돋우는 먹거리, 고즈넉한 바다와 해안길을 떠올리게 되는 제주는 여행, 휴식, 힐링, 자연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고 자란, 혹은 그곳을 떠나온 많은 이들에게 고향 제주는 한과 아픔이 응어리진 땅이다. 그곳에 자리잡고 앉은 흙과 돌, 푸른 물에는 피와 눈물, 처참하게 찢긴 살점이 스며 있다.

14년 전 아흔 살로 눈을 감은 진아영 할머니는 ‘무명천 할머니’라고 불렸다. 언제나 무명천으로 턱을 감싸 머리 위에서 매듭을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 연노란 페인트로 벽면이 채색된, 생전에 할머니가 살았던 월령리의 작은 집에 걸려 있는 사진 몇 점 속에는 천으로 턱을 감싼 할머니가 있었다. 평생을 혼자 살았던 할머니는 말을 못했다.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는 법도, 턱을 감싼 천을 푼 적도 없었다. 할머니에겐 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른다섯 살이던 어느 겨울, 할머니는 날아오는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졌다. 그저 밭일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왜 총을 맞았는지 영문을 몰랐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뒤에도 누굴 붙잡고 원망하거나 탓할 수 없었다. 기막힌 날벼락을 그저 가슴에만 새겨야 했던 할머니는 바닷가에서 톳을 따다 팔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평범하고 순박하게 살아가던 그의 삶이 바스라진 건 ‘4·3’ 때문이었다.

올해는 ‘제주 4·3’이 70주년을 맞는 해다. ‘제주 4·3’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이 ‘사건’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나.

정부는 공식적으로 ‘제주 4·3’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즉, 실상은 제주 전역에서 무고한 양민 3만명의 대다수가 군경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사건이다. 제주 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이래 벌어진 최대 참극이자 현대사의 비극이다. 당시 제주도민은 30만명이었으니 10분의 1이 희생당한 셈이다. 170여개 마을(리) 중 희생자가 없는 마을이 없었고, 제주 전역은 피로 젖은, 원혼이 떠도는 땅이 됐다. ‘4·3’ 70주년. 이제는 고통의 땅 제주를 직시해야 할 때다.

월령리 바닷가에 자리잡은 진아영 할머니 삶터. 진아영 할머니 삶터 보존회 회원들이 2008년부터 관리하고 있다. / 박경은기자

배경과 발발

해방 후 남한을 지배한 미군정은 효율적 통치를 위해 일제강점기 때 관리들을 그대로 등용했다. 제주도 마찬가지였다. 불신과 실망이 커지는 중에 흉년과 질병까지 겹치면서 도민들의 삶은 피폐해갔다. 1947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열렸던 3·1절 기념대회에 제주시에만 3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시위를 벌였다.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의 표출이었던 셈이다. 비극의 씨앗은 이때 뿌려졌다. 당시 기마경찰이 말발굽으로 어린아이를 치고서도 그냥 가는 모습에 분개한 시위대가 기마대에 항의하자 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관덕정 광장 앞에서 울린 총성으로 6명의 무고한 도민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경찰은 잘못을 인정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대신 시위대 검거에 나섰다. 도민들은 이에 항의하며 총파업으로 맞섰다. 3월 10일 시작된 제주 총파업은 민·관 할 것 없이 당시 직장인의 95%가 참여했다. 심지어 제주 출신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미군정은 제주를 ‘레드 아일랜드’, 즉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강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여기에 앞장선 것이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컸던 ‘서북청년회’(서청)다. 경찰로 들어온 이들은 이듬해인 1948년 4·3 이전까지 제주 전역에서 2500여명을 검거하며 폭압과 약탈을 일삼았다.

 

 

법 위에 군림하는 서청 등 공권력의 폭력, 그리고 남쪽만 단독으로 치러질 ‘5·10선거’를 앞두고 도민들의 반감과 불안감은 커져갔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한 300여명이 제주 전역에서 지서(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무장봉기에 나섰고 도민들도 심정적으로 이를 지지했다. 봉기세력과 도민들은 공통적으로 도민 탄압을 중단할 것과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외쳤다. 김구·김규식 등 민족지도자들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했다.

5·10선거 결과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 내 2개의 선거구에서만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산됐다. 미군정은 이를 불순세력의 음모이자 미군정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강경 토벌작전이 제주 전역을 휩쓸면서 본격적으로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초토화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대학살극이었다. ‘4·3사건’ 전체 희생자 3만여명 중 상당수는 1948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집중된 ‘초토화 작전’ 기간 동안 목숨을 잃었다.


파괴된 삶, 삶터

당시 제주 경비사령부는 해안에서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면 무조건 사살한다고 공표했다. 이어 계엄령이 내려진 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간인의 연계를 막는다며 중산간지역 마을 대부분을 불태웠고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이주시켰다. 하지만 쉽게 삶터를 떠나지 못하고 남은 주민들은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해안마을로 내려왔어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같은 운명을 맞아야 했다.

제주 중산간 곳곳에는 사라진 마을터가 여럿 있다. 밭농사를 짓거나 목축업을 하며 살던 평화로운 마을이 토벌대에 의해 불타고 사람들이 끌려가 죽은 뒤 그대로 ‘잊혀진’ 마을이 된 것이다. 제주시 곤을동, 리생이, 서귀포 영남동,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 삼밧구석 등이 대표적인 흔적들이다. 이곳엔 현재 표석이 세워져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제주시내와 비교적 가까운 곤을동은 불타버린 집터와 울타리, 집으로 들어가는 올렛길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130가구나 살 정도로 큰 마을이었던 무등이왓 역시 대규모 학살로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터전을 잃고 토벌대에 쫓긴 사람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굴 속에 몸을 숨겼다. 제주지역의 굴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굴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언뜻 보면 땅 속에 난 구덩이처럼 보이기 때문에 외지인이라면 좀처럼 찾기 쉽지 않다. 조천읍 선흘리 도틀굴, 목시물굴, 구좌읍 세화리 다랑쉬굴, 애월읍 어음리 빌레못굴,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궤는 제주말로 작은 동굴을 의미한다) 등은 당시 주민들의 은신처였다. 하지만 현지인을 앞세운 군경은 사람들이 피신한 동굴을 찾아내고 그 자리에서 총살하거나 입구에 불을 피워 죽였다. 1991년 발견된 세화리 다랑쉬굴 내부에는 질식사한 11구의 유골이 그대로 남아있어 큰 충격을 줬다. 제주 4·3평화기념관에 마련된 ‘다랑쉬 특별전시관’에는 발견 당시 동굴의 유골 모습과 내부에 놓여 있던 안경이며 비녀, 고무신, 놋숟가락 따위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120여명이 숨어 살 정도로 규모가 컸던 동광리 큰넓궤는 영화 <지슬>의 무대가 됐던 곳이다. 현재 이 동굴들은 안전상의 이유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입구에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안내판이 세워져 비극의 현장임을 알리고 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4·3 희생자 분포지도를 보면 유독 많은 희생자를 낸 마을이 있다. 남쪽에서는 가시리와 의귀리, 북쪽은 노형리와 북촌리다. 이 중에서도 북촌리는 이틀 동안 300명이 넘는 주민이 집단학살당했다. 1949년 1월 북촌 너븐숭이 인근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의 습격으로 숨진 데 따른 보복이었다. 당시 11살 소녀였던 고완순 북촌리 노인회장(80)은 죽음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북촌초등학교에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군인들이 기관총을 난사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몇 명씩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갔는데 어김없이 총소리가 들렸지요.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결국 우리 차례가 왔어요. 옴팡밭에 끌려가 엄마와 언니 손을 꽉 잡은 채 앞만 보고 있었어요. 이미 우리 앞엔 죽어서 널브러진 시신들이 즐비했지요. 늦은 오후였는데 구름 속에 들어갔던 해가 잠깐씩 나올 때마다 피가 엉겨붙어 시커멓게 된 흙바닥이 반짝거리던 게 지금도 생각나요. 뒤에선 총알을 장전하는지 계속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지프차가 나타나더니 ‘사격중지’ 하더라고요.”

목숨은 부지했지만 집도, 마을도, 이웃도 사라진 뒤였다. 엄마 등에 업혀 울던 세 살배기 남동생은 군인이 내려친 몽둥이에 머리를 맞은 뒤 3년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 외할머니와 이모, 외삼촌도 죽음을 당했다. 그는 “학교로 끌려나오던 길에 손을 묶인 채 군인 트럭에 타고 있던 이모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면서 “가슴과 국부가 모두 도려내진 이모의 시신을 엄마가 수습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원읍 의귀리에 있는 현의합장묘도 군인들에 의해 학살당한 80여명의 넋을 기린 곳이다. 1949년 1월 초 이곳에 주둔했던 부대는 무장대의 습격을 이유로 마을사람들을 죽였다. 뒤엉켜진 모습 그대로 인근 구덩이에 묻혔던 시신은 2003년에야 유해발굴작업이 이뤄지며 현재의 위치에 안장됐다. 전 유족회장이자 현재 4·3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양봉천씨(72)는 “처참하게 뒤엉켜 있는 유해를 수습할 때 다들 ‘멜젓 담그듯 시신을 던져 넣었다’며 가슴을 쳤다”고 말했다. 현의합장묘와 의귀초등학교 사이에 있는 ‘송령이골’은 무장대의 시신이 묻힌 곳이다. 일제가 남긴 구식총이나 죽창을 들었던 무장대가 신식무기를 갖춘 정예군대에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당시 전투에서 무장대는 50명 이상이 사망하며 전멸하다시피 했다. 4·3의 많은 흔적들 중 거의 유일한 무장대의 무덤, 즉 ‘불순한’ 곳으로 터부시되고 방치돼 있던 이곳은 2004년 도법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찾아 천도재를 지낸 뒤에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한동안 잦아들었던 피바람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거세졌다. 일명 ‘예비검속’. 입산자의 가족이나 요시찰자로 분류된 이들은 대대적으로 체포돼 처형당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형량도, 죄목도 모른 채 형식적인 재판만을 거쳤을 뿐이다. 육지의 형무소로 보내져 즉결처분된 희생자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4·3평화공원에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총 3895기의 행방불명인 표석이 세워져 있다. 모슬포 알뜨르비행장 인근 섯알오름은 250여명의 예비검속자들이 총살당한 곳으로, 군에 의해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되는 바람에 유족들은 7년 뒤에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섯알오름 인근의 백조일손지지는 이 중 132구의 시신을 안장한 묘역이다.


이름 없는 4·3

4·3이 끝난 뒤에도 통곡의 시간은 지속됐다. 3만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은 ‘빨갱이’라는 누명을 썼기 때문에 그 유족들 역시 연좌제에 의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4·3연구소 김은희 이사는 “레드 컴플렉스가 섬을 뒤덮은 상태에서 유족들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전쟁 당시 군 입대를 자원했다”면서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해병대 3~4기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고 설명했다.

4·3평화기념관에 들어서면 관람객을 처음 맞이하는 것은 누워 있는 큼직한 비석이다. 비문이 없는 비석, ‘백비’다. 이는 ‘4·3’의 이름이 아직도 정해지지 못한 까닭이다. 현재 이를 통칭하는 이름은 그저 ‘4·3’이다.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분단에 반대하고 온전한 독립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항쟁이나 항거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의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이를 보는 시각은 빨갱이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반란이었다. 그나마 2003년 발표된 정부의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4·3사건’으로 언급돼 있다. 4·3평화기념관은 백비의 의미에 대해 ‘4·3은 아직도 정명(正名)되지 못한 역사’라며 ‘4·3의 진정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날, 비로소 비문이 새겨질 것이며 누워 있는 비석도 세워질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수십 년간 숨죽여 있던 4·3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가 본격화된 것은 87년 민주화항쟁 이후다. 도민들의 꾸준한 용기와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공포됐고, 2003년에는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됐다. 그해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도민들에게 국가권력의 과오를 인정하고 공식사과했다. 처음으로 이뤄진 대통령의 공식사과는 도민들을 짓눌렀던 이념의 멍에를 벗겨내는 계기가 됐다. 2014년에는 ‘4·3 희생자 추념일’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됐다.

하지만 4·3의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처럼 가해자를 규명하고 유족의 한을 해소하는 것 역시 현재 진행 중인 문제다. 제주4·3유족회 양윤경 회장은 “미 군정기에 발생한 사건인 만큼 미국이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데도 책임을 인정한 적이 없다”면서 “올해 70주년을 맞아 미국의 책임 규명을 요구하는 10만인 서명을 받아 한·미 양국 정부와 유엔 과거사 보고관에게 전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상처뿐인 4·3을 지난 보수정권 기간 동안 이념의 잣대로 난도질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4·3평화공원을 찾아 희생자의 위패 화형식을 갖거나 폭도공원이라는 망언을 일삼은 사례도 많았다. 양 회장은 “희생자를 재심의하자거나 4·3을 모욕하는 일이 더는 없어야 한다”면서 “후세에게 4·3을 제대로 알리고 교육해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알리는 것이 4·3 해결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국회에는 ‘4·3특별법’ 개정안이 제출돼 있다. 핵심 내용은 피해자들에 대한 배·보상, 그리고 불법적인 군사재판을 받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다.


 

<양조훈 4·3평화재단 이사장 “군사·독재정권이 오랜 기간 이 사건을 지하에 가둬”>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 두 명이 할아버지 제사를 같은 날 지낸다는 거예요. 4·3이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은 거죠. 집에 가서 엄마에게 4·3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그 말을 다시는 입밖에도 내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 같은 동네에서 총살당했던 분들 가족들이 모여 공동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었어요.”

제주 출신인 회사원 최근영씨(48)는 또래의 친구들이 모두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4·3은 알 수도, 알아서도 안 되던 사실이었다. 이를 제대로 접하게 된 것은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다. 실제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제주도민들은 4·3을 입밖에 내지 못했다. 1980년 발생한 5·18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반면 훨씬 전에 발생한 4·3은 제주에만 머물러 있었다. 다음은 4·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사진)과의 일문일답이다.

 

 

-4·3이 70주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 4·19혁명 후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물거품이 됐다. 이후 군사·독재정권이 오랜 기간 지속됐던 것이 이 사건을 지하에 가뒀다. 끔찍한 일을 겪었던 유족들 역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잡혀간다는 공포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1990년 이전까지는 교과서에서도 4·3을 북한 공산당 사주 아래 일어난 폭동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현재의 기성세대는 그런 교과서로 교육 받았던 셈이다. 오히려 진실규명 작업은 예술인들에 의해 먼저 시작됐다. 1978년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은 처음으로 4·3의 진실을 말한 작품이었다.”
-미국 측의 책임규명을 요구하는 서명을 받고 있는데 미군정이었다는 상황 외에 다른 근거가 있나.

“대학살이 벌어진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지만 군경의 무기와 장비를 지원한 것은 미국이었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이던 로버트 장군이 1948년 12월 한국 정부에 보낸 편지를 보면 ‘중산간지역을 쓸어버린 초토화작전은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한 부분이 나온다. 1949년 1월 대한민국 정부 국무회의록에 기록된 이승만 대통령의 제주사태 언급 중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적극적으로 받기 위해’라는 표현을 사용한 대목이 있다. 미국이 제주사태에 그만큼 관심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된 뒤 <뉴욕타임스>는 ‘1948년 총선거가 보이콧되자 남한에 주둔했던 미군사령관들은 분개했고 그 이후 섬 주민들을 청소하는 작전을 진행했다’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전국에서 치러진 선거 중 제주에서만 무효가 됐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무장대가 지서를 습격했던 1948년 4월 3일 당일의 사건은 전국적으로 봤을 때 특별한 건 아니었다. 전라도 등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 미군정 역시 이를 단순한 치안상황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핵심은 선거 무산이었다. 미군정은 이를 엄중한 도전으로 봤다. 실제로 당시 제주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았고 깨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와 오사카 사이에 여객선이 다녔는데 그때 5만명 이상의 제주 청년들이 오사카로 건너갔다. 현지에서 일하면서 이들은 자각하기 시작했고 교육에 힘썼다. 해방과 함께 이들이 고향에 돌아온 직후 실시한 교육수준 조사에서 38선 이남지역 중 제주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제주 사람들의 높은 자각이 저항력을 더 강화했다고 볼 수 있다.”
힐링의 섬 제주, 이제는 그 섬을 치유할 때다

 

 

<어두운 역사의 상처 새겨보는 ‘4·3길’>

제주의 빼어난 경관은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올레길을 비롯, 각종 공원과 유원지를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그곳은 학살과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최근 제주에는 ‘다크투어’라는 이름으로 유적지를 찾아 어두운 역사의 상처를 살피는 투어도 생겨나고 있다.

‘4·3 유적지’로 이름 붙은 곳들이 특별한 무언가는 아니다. 우리가 제주에 가면 늘상 찾는 올레길과 오름, 곶자왈 숲길, 해변길에 비극의 현장들이 스며 있고 연결돼 있다. 그러니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화의 의미도 새겨보는 의미 있는 여행을 할 수 있다.

제주도는 2015년 안덕면 동광리에 ‘동광마을 4·3길’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모두 5개의 4·3길을 만들었다. 마을회관이나 기념센터에서 시작해 6~7㎞에 이르는 주요 코스를 2시간 정도 걸으며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자신의 여행 일정과 가까운 지역이 있다면 올레길 대신 4·3길을 걸어볼 만하다. 지역마다 ‘4·3해설사’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가 있기 때문에 미리 신청하면 해설을 들으면서 함께 걸을 수 있다.

■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하룻동안 둘러볼 수 있는 평화기행 추천 코스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제주시 동부권 : 관덕정 화북 곤을동-4·3평화공원-선흘 목시물굴-낙선동 성터-북촌 너븐숭이 기념관과 애기무덤-다랑쉬굴과 다랑쉬마을

제주시 서부권 : 정뜨르비행장-하귀 영모원-빌레못굴-진아영 할머니 삶터-만벵듸 공동장지

서귀포 서부권 : 동광 잃어버린 마을과 헛묘-동광 큰넓궤-대정 백조일손지묘-알뜨르-섯알오름

서귀포 동부권 : 4·3평화공원-남원 현의합장묘-의귀리 송령이골-표선 백사장-성산읍 터진목 및 4·3위령공원

■ 개별적으로 다닐 수도 있겠지만 그룹으로 함께 할 경우 관련 단체의 해설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4·3연구소(www.jeju43.org), 제주다크투어(blog.naver.com/jejudarktours), 제주생태관광(www.stroyjeju.com), 제주 4·3문화해설사회(cafe.daum.net/Jeju4.3)

■ 4·3길 문의


제주특별자치도 4·3지원과 (064)710-8454, 동광리(064)794-8722, 의귀리 (064)764-0185 북촌리 (064)783-4303, 금악리 (064)796-6368, 가시리 (064)787-1305

 

 

  1. 2018.11.12 23:27  링크  수정/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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