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완고한 아버지 역 벗고 코믹 의사로 연기 변신…

 ‘닥터 이방인’ 최정우

박경은 기자 king@kyunghyang.com

ㆍ“힘든 후배 도와주고, 함께 연기하고… 광대로 태어났으면 그렇게 사는 거죠”
ㆍ유아적 기싸움에 몸 개그도 작렬… 온라인서도 ‘정말 귀엽다’ 폭발적
ㆍ“베를린 영화제에 가고 싶었는데 요즘엔 멋진 드라마 만드는 게 꿈”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의 축’, 카리스마 넘치는 기득권 실세, 혹은 파쇼적이지만 속은 외로운 아버지. 배우 최정우(57)는 늘 그런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만나왔다. 잔잔하던 드라마에 그가 등장하면 시청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려나 보다” 하며 긴장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그가 배꼽잡는 코믹 연기로 사람들의 눈물을 쏙 빼놓고 있다. SBS 드라마 <닥터 이방인>에서 그가 연기하는 흉부외과 의사 문형욱은 국내 의학드라마에 등장했던 의사를 통틀어 아마 가장 유치하고 단세포적인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자신의 잇속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감정표현도 직접적이라 누구에게나 속내를 들키고 만다. 자신을 ‘주인님’이라 부르는 탈북의사 박훈(이종석)과 유아적 기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몸개그’도 수시로 펼친다. ‘메디컬 첩보 멜로’를 표방하며 난해하게 꼬인 드라마에 문형욱·박훈 커플은 활기를 불어넣으며 시청률을 지탱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그를 가리켜 ‘졸귀’(정말 귀엽다는 뜻의 인터넷 신조어)라고 표현한 댓글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만면에 띄운,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았다. “처음엔 무지하게 고민했죠. 이 정도 사회적 지위와 연륜을 갖췄다는 사람이 이렇게 단순할 수 있나 싶어서. 정신세계의 성장판 일부분이 닫힌 사람으로 생각하고 보니 스스로 좀 납득이 되더라고요.”

배우 최정우는 50이 넘어서야 안방극장에 데뷔했다. 현재 SBS <닥터 이방인>에서 ‘유치찬란한’ 의사 문형욱을 연기하는 그는 “문형욱은 밉긴 하지만 측은지심이 생기는, 그래도 인간미와 순진함이 살아 있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그는 실제로도 철없이 사는 편이라고 했다. 배우가 나잇값을 하기 시작하면 보송보송한 감성과 순수한 꿈을 잃기 쉽단다. 그 때문인지 주변엔 늘상 술 사달라고 엉기는 후배들로 넘쳐난다. 그에게 어떤 아버지인지 묻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배우는 광대잖아요. 광대는 사람들에게 슬픔과 기쁨을 전달하며 그렇게 살다 떠나는 나그네 같은 인물이죠. 광대는 너무 많이 가져도, 너무 인기가 많아도 감당하기 힘들어요. 젊은 시절부터 그런 생각이 나를 많이 지배했어요. 그러다 보니 내 대에서 광대의 삶을 끝내고 홀연히 떠나면 되지, 내가 어떻게 자식을 낳고 책임지나…. 그래서 저는 자식을 낳지 않았어요.”

극심한 풍상과 시련을 겪으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에게 광대의 삶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늘상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근 채 먼저 말을 거는 법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도 없던 소년. 그를 유심히 지켜본 고교 시절 담임교사는 치유의 방편으로 그에게 연극을 권했다. 작은 극단에 발을 디딘 지 3~4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그는 처음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데서 오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남의 입장이 돼보는 것, 그리고 소통하면서 뭔가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자연히 입과 마음을 열기 시작했죠. 돌아가신 은사님 아니었으면 아마 제가 지금처럼 사회의 일원으로 살 수 있었을까 싶어요”.

낯가림 심하고 우울하던 소년은 무대를 통해 변해갔다. 무대를 통해 세상과 만났고 그의 세계는 확장됐다. 호남형 외모와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는 연극판에서 그의 대중적인 인지도도 높여줬다. 심지어 연극을 통해 큰돈도 벌었다. 1992년 그가 제작·주연했던 연극 <불 좀 꺼주세요>는 3년간 30만명이라는 파격적인 관객을 모았고 서울 정도 600년 기념 타임캡슐에 영화 <서편제>, 가요 ‘핑계’와 함께 연극의 대표작품으로 선정됐다.

“고작 30대였는데 다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무작정 LA로 갔어요. 거기서 놀면서 살겠다고 실내포장마차를 냈는데 1년 반 만에 술병나서 돌아왔어요. 엉뚱한 짓을 잠시 했는데 내가 가면 어디 가겠어요.”

30년 가까이 연기생활을 해왔지만 그에게 TV는 낯선 매체였다. 2007년 공연장으로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온 나홍진 감독의 권유로 출연했던 영화 <추격자>에서 그가 보여줬던 색다른 관료의 모습은 지상파 방송국 PD들의 러브콜을 이끌어냈다. 순전히 왕(인조)을 시켜준다는 제안에 출연을 승낙했던 KBS <최강칠우>(2008년)를 시작으로 드라마에 본격적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SBS <바람의 화원>에서 진혁 PD와 인연을 맺은 뒤 <찬란한 유산> <검사 프린세스> <주군의 태양> <닥터 이방인>까지 그의 작품엔 모두 출연했다.

“몇년 전만 해도 베를린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드라마를 하면서 다 접었어요. 대신 요즘은 작가, 연출, 배우, 스태프와 함께 좋은 팀을 짜서 정말 멋진 드라마 한 작품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후배들 만나면 그래요. 난 물려줄 자식이 없으니까 내가 벌어놓은 건 너희들이 다 갖다 쓰라고. 힘든 후배들 도와주고 그렇게 연기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자고. 광대로 태어났으면 그렇게 살다 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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