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샐러리맨의 신화, 그리고 그 신화의 몰락.
 올해는 유독 신화의 몰락을 여러차례 지켜보게 되네요. 웅진 윤석금 회장에 이어 STX 강덕수 회장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입지전적의 인물, 샐러리맨의 신화, 전설... 재계에는 이런 인물들이 여러명 있었습니다. 신화를 쓴 이들의 이야기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꿈을 갖게 만들고 있지요. 자기가 입사한 회사에서 사장, 회장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물론 대단한것이지만 직접 회사를 만들어 손꼽히는 회사로 만들어내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재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들 중에선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사람도 있고 몰락한 사람들도 꽤 있는
데 신화를 쓴(몰락했든 승승장구하든간에) 사람들을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강덕수 회장은 동대문 상고를 졸업한 뒤 1973년 쌍용양회에 평사원으로 입사했습니다. 여기서 쌍용중공업 재무 책임자까지 오릅니다. 그가 ‘창업’을 한 것은 2001년. 사재를 털어 자신이 일하던 쌍용중공업이 매물로 나오자 회사를 인수합니다. IMF 외환위기로 쌍용그룹이 해체됐는데 강회장은 당시의 외환위기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쌍용중공업에 자신의 전재산을 던져 모험을 건 셈입니다. 인수 뒤 사명을 STX로 바꾸고 잇따라 굵직한 M&A를 성사시키며 재계 13위로까지 수직상승합니다. IMF 외환위기가 수많은 기업과 경영자에게 몰락의 숙명을 안겨줬지만 그에겐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의 공격적인 경영과 사세확장은 재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고 수많은 직장인들과 취업준비생들은 그를 ‘닮고 싶은 경영자’로 꼽기도 했습니다.

 

 


2009년 무역의 날에 훈장받는 강덕수 회장


 


 그런데... 2008년. 또 다른 금융위기에 STX는 발목을 잡히고 만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입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계 조선, 해운 경기는 바닥을 모르고 가라앉았으며 이 사업이 그룹의 주력이던 STX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시작됐습니다. 재기를 위해 안간힘을 썼던 강회장은 채권단의 사퇴 권유에도 경영 의지를 밝혀오다가 결국 책임을 지고 물러낫습니다.

 

 

 샐러리맨 신화의 원조는 대우 김우중 회장입니다. 30대 이상만 해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재계를 호령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데 얼마전 20대 초반의 어린 친구에게 대우이야기를 했더니 마치 전설의 고향 이야기 듣는듯 하더라는...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는 김 회장의 자서전은 상당히 오랜기간 베스트셀러였으며 자기개발서이자 누구에게나 ‘나도...’하는 의지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던 성공신화였었지요.

 

 

1989년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세계경영. 말이 참 멋지죠. 대우가 내세웠던 세계경영은 정말 많은 사람들을 세계 무대로 뛰쳐나가게 만들었습니다. 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와 국교를 맺지 않았던 동유럽 국가는 그 이전부터 세계경영을 내세운 대우가 진출해 터를 닦았지요.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에 있는 한인민박이나 한인식당을 가보면 당시 대우 주재원으로 진출했다가 눌러앉은 분들이 상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대우의 세계경영시절, 1년의 상당부분을 해외 사업장에서 보냈던 김회장이 기내에서 업무를 보는 모습

 


 김우중 회장은 31세이던 1967년 대우실업을 설립하면서 대우그룹의 첫 발을 뗍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무역회사에서 실무를 쌓은 뒤 회사를 차린거죠. 그리고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사업을 확장합니다. 건설, 전자, 자동차로 영역을 넓혀가고 활발하게 인수합병을 하며 대우그룹은 41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2위 그룹으로까지 올라갑니다. 해외 법인만 400개에 가까울 정도였으니 국내 기업중 최다 규모였지요.

 

 

1992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입니다. 왼쪽 사람이 김회장이죠. 동구권과 수교를 막 맺기 시작하던 이당시 김 회장은 민간 외교사절로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1997년말 닥친 외환위기는 대우 몰락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빚으로 사업을 확장했던터라 당시 부채비율이 높았던 대우그룹 계열사들은 강력한 구조조정에 돌입하게 됐지요. 1999년 모든 계열사들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지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한 김 회장은 중국 자동차 부품 공장 준공식 참석을 이유로 출국한 뒤 국내에 들어오지 않고 수년간의 해외 도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6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05년 6월 귀국해 검찰조사를 받았지요. 분식회계, 사기대출, 횡령, 국외재산도피 등의 혐의로 그는 복역했고 2007년 말 특별사면됐습니다. 현재는 해외에 머무르고 간간이 국내에 들어오기도 하는데 그 때마다 재기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기는 하지만 그의 건강상태나 자금문제 등을 고려해볼 때 사실상 재기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에 탄 채 법원을 나서는 김회장

 

도피생활 3년째에 동남아의 어느 별장에서 도올 김용옥을 만나 인터뷰하며 찍은 사진. 당시 문화일보에 나왔던 사진입니다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도 입지전적 인물이지요. 백과사전 외판원에서 시작해 재계 30위권의 대기업 총수에 올랐으니까요. 1971년 한국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외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윤회장은 이 때부터 남다랐던 것 같습니다. 판매를 시작한지 한달만에 세계 54개국 세일즈맨 중 판매왕을 차지했으니까요. 1980년 영어테이프를 판매하는 헤임인터내셔널을 설립했는데 이 회사가 웅진그룹 모태인 웅진출판이 됐습니다. 출판에서 정수기, 렌털사업으로 확장하다가 생활가전, 건설, 식품, 금융, 태양광까지 웅진은 32년간 15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매출 6조원대 그룹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의욕이 문제였습니다. 빚으로 극동건설을 인수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에 역시 발목을 잡히고 맙니다. 그도 IMF위기 당시 정수기 판매사업의 위험부담이 커지고 수익성이 낮아지면서 렌털시장을 개척해 대박을 냈었다는 점에서 강회장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현재 웅진그룹은 웅진코웨이등 주요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 초고강도의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구조조정이 마무리된다면 웅진씽크빅 등 출판 사업만 남게 됩니다. 사업을 처음 시작하던 때로 되돌아가는거지요.

 

 

윤석금 회장



 

 

샐러리맨 신화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한명의 인물은 팬택 박병엽 부회장입니다. 그도 역시 앞서 예를 든 기업인처럼 위기를 만났지만 그 앞에서 기사회생하며 부활의 신화를 써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인물이지요. 팬택은 몇년간에 걸친 워크아웃을 졸업하며 재기의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박 부회장은 원래 맥슨전자에 입사해 잘 나가는 ‘직장의 신’으로 승승장구하다 전세금을 빼 창업을 합니다. 무선호출기 생산업체를 차린거죠. 90년대 초반 ‘삐삐’라 불리던 무선호출기를 만들기 시작한거죠. 그렇게 발을 들여놓은 뒤 90년대 후반 벤처 IT 붐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걸면 걸리는 걸리버... 라는 카피로 알려진 현대 큐리텔을 인수했고 SK텔레콤 계열사이던 텔레텍까지 인수하면서 사세를 키웁니다. 이 덕분에 한때 팬택은 세계 휴대폰 시장 7위까지 올라서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무리한 확장과 차입경영, 세계 업계의 견제 등은 결국 팬택에 위기를 가져오고 2006년 워크아웃을 신청하게 됐습니다.

 

 



 


 현재까지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는 또 다른 신화의 주인공은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이 있습니다. 동원증권에서 일하던 증권맨이던 그는 1997년 회사를 창업한 뒤 외환위기 광풍이 몰아치던 와중에 국내에 처음으로 뮤추얼펀드를 도입하면서 바람을 불러일으켰죠. 펀드시장이 열풍을 일으킬 때도 선두에 있었습니다. 인사이트펀드의 실패 등은 그를 위기에 몰아넣기도 했습니다. 사실 인사이트 펀드가 광풍이던 그 때 제가 증권, 펀드 분야의 취재를 담당했었습니다. 당시 여의도 미래에셋 객장에 가보면 인근 직장인은 물론이고 아이를 안고 온 젊은 주부, 할아버지, 심지어 수녀님까지 봤을 정도였으니 인사이트 펀드는 시장의 돈을 싹쓸이하다시피 했습니다. 펀드를 비롯해 금융시장이 다시 부침을 겪고 있는데 박회장이 또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해갈지 궁금합니다.

 

 

박현주 회장



 

 

저작자 표시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