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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토크

드라마 속의 재벌, 그 속에 감춰진 현실

by 신사임당 2011. 3. 21.


같은 부에 있는 선배가 재미있는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나 요즘 일주일 내내 재벌마인드로 살아”.
말씀인 즉, 즐겨보는 드라마들이 하나같이 재벌이 주인공인 드라마 일색이라며 일주일 내내 재벌을 보고 산다는 것이었죠. 월요일과 화요일엔 <마이더스> 수요일, 목요일엔 <로열패밀리>, 주말엔 <욕망의 불꽃>까지. 이뿐이 아닙니다. 매일 저녁 방송되는 일일드라마 <웃어라 동해야>, <호박꽃순정>, <남자를 믿었네> 역시 재벌가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들입니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기웃거려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재벌 드라마 뿐이네요. 게다가 지금 방송되는 재벌드라마들은 단순히 환타지를 자극하고 충족하는 배경으로서의 재벌이 아니라 암투와 음모, 추악한 인간의 내면을 극대화하고 묘사하는 도구로 그 효용을 발하고 있습니다. 극적인 갈등이 극대화되다보니 등장하는 인물들도 비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들 일색입니다. 수많은 시청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런 재벌드라마에 자신의 고단한 삶을 기대고 감정을 이입해야 하는 셈입니다.


 물론 재벌드라마가 요근래만 많은 것은 아닙니다. 얼마전 막을 내린 <시크릿가든>을 비롯해 <제빵왕 김탁구> <태양을 삼켜라> <마이프린세스> <에덴의 동쪽> <아가씨를 부탁해> <꽃보다 남자>, 더 멀리 가서는 <내 이름은 김삼순> <발리에서 생긴 일>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전에 방송됐던 재벌드라마는 소위 막장적 요소가 가미된 코드도 있었지만 대부분 대중들의 환타지를 자극하는 수준이었습니다만, 지금처럼 한꺼번에 ‘막장’ 일색인 암투와 음모로 점철된 재벌드라마가 쏟아지는 것도 드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왜 이렇게 재벌드라마가 쏟아지는 걸까요. 일단은 환타지와 상상력의 극대화를 꼽을 수 있겠죠. 드라마가 환타지의 산물이다보니 대중들의 환타지를 자극하기에 재벌만큼 단골로 사용되는 소재도 없습니다. 예전부터 드라마의 주된 시청층은 여성들이었는데, 평범한 여성과 재벌남성과의 만남과 사랑은 극적 효과가 높은 소재로 자주 사용됐습니다. 환상을 충족하고 대리만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벌들에 대한 화려한 묘사는 현실성 여부를 떠나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는데 적합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희소성도 있습니다. 대중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의 말초적이고 근본적인 욕망인 호기심과 동경을 자극합니다. 우리들의 일반적 마음을 생각해보면 그 이유가 충분히 이해되기도 합니다. 저 역시 나 보다 잘나고 잘 사는 사람, 사회적 명망과 유명세를 떨치는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과 삶에 무의식적인 호기심과 관심이 생기는 것을 느낍니다. 호화로운 레스토랑에서 청소를 하고 허드렛일을 하는 아주머니들이 퇴근해서 저녁상에 뭘 올려놓고 먹을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레스토랑에 오는 사람들은 얼마짜리 저녁을 먹고 어떤 차를 타고 어떤 옷을 입는지 쪽이 더 솔깃한 호기심이 생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겠지만 저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처럼 재벌이라는 것은 일반 대중은 웬만해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희소성 넘치는, 궁금한 세계입니다.
 

 
재벌이 기본적인 드라마 소재로 차용되는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여기에 최근 나오는 재벌 드라마의 특징은 현실적인 사례를 덧입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동시에 쏟아져나왔을 뿐이지, 이들 드라마는 묘한 기시감을 줍니다. 뉴스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일들이 드라마에 상당히 겹쳐있습니다. 이 때문에 최근 재벌 드라마를 보면 누구를 모델로 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은 자리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제작진은 특정인이나 특정 사건을 반영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여러가지 사건과 인물에서 한꺼번에 모티브를 따왔다고 이야기합니다. 특정인을 지목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실제로 최근 십여년간 우리 사회에는 전례없이 재벌들의 사생활이나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그들만의 리그’가 뉴스를 통해 대중들에게 공개됐습니다. 개발독재시대를 지내오면서 십수년전만 해도 재벌들의 뉴스는 고작 어느 그룹이 어떤 업적을 달성했고 어느 회장이 어떤 좋은 일을 했다는 식, 혹은 재벌가 누구끼리 결혼을 했다거나 부도가 났다는 정도로 일반인들의 피부에는 잘 와닿지 않는 뉴스 일색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 십여년간 쏟아졌던 뉴스를 더듬어볼까요. 경영권분쟁과 이를 둘러싼 갈등, 파렴치한 범죄,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특히 경영권을 둘러싼 가족간 분쟁은 마치 사극을 보는 느낌입니다. 10여년전 ‘왕자의 난’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사건은 형제간, 부자간 갈등을 보여줬던 사례입니다. 당시 5~6년차 기자였던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같은 배에서 난 형제간인데, 친아버지와 아들간인데 왜 저 난리들인가 하며 세상물정 모르는 생각을 잠시 가졌었다가 왕권을 놓고 혈육끼리 죽고 죽이는 사극을 떠올리며 대충 그 심정을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여튼 이후 현대가의 경영권 분쟁은 시숙과 조카며느리, 아주버님과 제수씨로 이어지면서 지속적으로 불씨를 안고 있습니다. 동아제약, 금호, 두산, 진로 등등 많은 기업들 역시 경영권을 둘러싼 집안싸움으로 경제면의 뉴스를 장식했습니다. 한편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은 조용히 내조에만 전념하다가 남편의 죽음 뒤 경영일선에 나섰다는 면에서 상당히 극적인 뉴스의 주인공이기도 했습니다.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난 재벌 3세 여성들의 행보도 드라마에 많은 소재를 제공해준 것 같습니다.

 

사회면을 장식한 재벌들의 추한 이면을 드러냈던 뉴스 역시 빼놓을 수 없겠죠. 탈세, 편법증여, 비자금 사건으로 서민들을 맥빠지게 했던 뉴스는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정도입니다. 재벌회장의 보복폭행, 맷값 폭행사건, 얼마전에는 중견기업의 며느리가 경영권 분쟁에서 이기기 위해 시동생 등 가족의 뒤를 캐다가 검찰에 붙잡혔던 사례도 있습니다. 친자확인 소송을 통해 복잡한 가족관계가 드러나는 것도 다반사이고요. 알려진 것만 이정도니 드라마에 등장하는 온갖 ‘막장’ 장치들은 충분히 현실성있고 수긍할만하기도 합니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환타지의 대상이었던 재벌을 그리는 드라마가 비정상적인 행태를 일삼는 막장 인간 군상만 그리고 있다고, 우월의식과 선민사상에 빠진 인물들로 구성된 사람들로 그리고 있다고. 서민들위에 군림하고 우롱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통속적 재미와 시청률이 중요하긴 하지만 오히려 이같은 묘사가 시청자들에게 스트레스와 허탈감을 안겨준다고. 이렇게 드라마에 대한 비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씁쓸합니다. 고작 20회, 아니면 좀 더 걸릴지라도 몇달내에 결판이 나는 드라마는 아무리 갈데까지 가더라도 마지막에는 권선징악적 요소와 교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면서 마무리되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드라마는 상상 이상의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을테고(밖으로 공개되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그들만의 공고한 성속에서 무한재생되고 있습니다.
 
 

 직간접적으로 접했던 많은 사례들을 보면 소위 재벌이라고 지칭되는 부류들은 스스로가 일반대중들과는 엄연히 다른 신분이라는 믿음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봉건시대에 세습되는 귀족신분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말이지요.
 

몇년전 재벌가의 여성들의 자선모임을 취재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의 딸, 며느리들이 주축이 돼 기부한 물건을 판 수익으로 북한 어린이를 비롯해 저소득층을 돕는 행사였습니다. 행사가 끝난 뒤 모임 회원들, 행사 진행을 맡은 연예인들과 함께 행사장 한켠에서 밥을 먹게 됐습니다. 우연히 제 옆 테이블에 앉은 분들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됐죠. 처음엔 가족의 사업과 안부이야기를 하는 듯 하더니 화제는 이내 드라마로 옮겨갔습니다. 그때 김현주가 주연을 맡은 <파란만장 미스김 10억만들기>가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었나봅니다. 한분이 그 드라마 이야기를 한참하고 있는데 다른 분들이 되묻더군요. “10억만들기 맞아?” “그럴껄. 파란만장 미스김 10억만들기였던것 같은데” “설마? 100억만들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