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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스코프

읽은 듯 읽지 않은 읽고 있는 고전 아Q정전

by 신사임당 2018. 7. 31.


정신승리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뜻을 알고 자주 쓰는 말인데 어느 때부터 퍼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적어도 20세기에는 잘 쓰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뒤늦게 <아Q정전>을 읽으며 알게 됐다. 정신승리라는 말이 이 소설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가뜩이나 많이 들어본 책은 잘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고등학교 때인가 국사시간에 들었던터라 <아Q정전>은 내 머릿속에서 착각을 넘어 확신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 근대화 시기에 민중들을 깨우치고 계몽하기 위한 소설로, 주인공은 무지몽매에 빠져 있던 중국인을 상징하는 인물 어쩌고 하는 정도의 설풋한 내용말이다. 

 

얼마전 집 정리를 하다 책장 한구석에서 빛깔이 누래진 <아Q정전>을 발견했다. 넘겨보니 종이가 삭아서 바스라질 듯 했다. 그냥 버릴려다 한번 읽어나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다른 책들은 제목에서 대충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누가 주인공인지 유추할 수 있는데 이 제목은 당췌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제목을 보면 도대체 저게 뭘 지칭하는지, 주인공 이름이 포함된 제목이라면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지몽매한 당시의 민중을 대표하는 주인공 이름이 Q인지, 아Q인지, 아Q정인지 말이다. 훌쩍 넘겨보니 분량도 많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 읽어보자고 책을 들었다. 


영문제목과 저자 루쉰의 사진이 실린 표지/ 위키피디아



소설 첫 줄에서 주인공의 이름과 제목의 뜻은 모두 풀린다. 

 

 “내가 아Q에게 정전을 써주기로 마음 먹은 것은 사실 한두 해 전의 일이 아니다.”


그러니 주인공 이름은 아Q다. 그리고 뒤에 붙은 정전은 이 글의 형식이다. 그래도 뭔가 명쾌하지는 않다. 조금 읽다보면 이에 대한 설명이 다 나온다. 


 “열전이라고 하기에는 아Q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처럼 정사에 끼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자전은 어떤가. 나는 결코 아Q가 아니지 않은가? 외전이라면? 그럼 내전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중략/ 그래서 옛날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했던 소설가들이 했던 말, 즉 ‘쓸데없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정전(正傳)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에서 ‘정전’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본 편의 제목으로 삼았을 뿐이다.”


정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경위다. 그 다음으로는 왜 이름이 아Q인가. 이것도 정확하지 않다. 사람들이 그를 아꿰이라고 불렀다는데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 즉 어떤 한자를 써야 할지도 분명치 않은 것이 그의 이름이다. 게다가 ‘꿰이’라는 음을 가진 글자는 거의 없기 때문에 당시 들어온 서양문자를 사용해 아Q라고 썼다. 물론 근본도, 고향도, 본적도 불분명한 그는 성씨도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그저 이리저리 불리는 이름, 아Q. 그뿐이다. 이름에서조차 그의 존재가 얼마나 비루하고 보잘것없고 찌질한 취급을 받았는지 느낌이 온다. 쥐뿔도 없으며 늘상 차별과 무시를 당하는 그는 자존심만은 무지 강했다. 주변과는 제대로 소통을 할 줄도 모르고 싸우기도 많이 싸운다. 그가 많이 쓰는 말들은 이렇다. 


“나도 옛날에는 너희들보다 훨씬 나았다구!”

“내 아들은 훨씬 더 나을거라구!”


그러면서 약자에겐 마초적이고 폭력적이다. 


“자신의 컴플렉스를 건드리는 자가 있으면 고의든 실수든 간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곤 했다. 그는 우선 상대방을 보아 어눌한 자에게는 욕설을 퍼부었으며 자기 보다 힘이 좀 약한 것 같으면 때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스타일이다. 늘상 무시당하고 속된 말로 ‘개박살’이 나지만 그는 이 때마다 최고의 강점을 드러낸다. 바로 정신적으로 승리했다고 믿으며 득의양양한 것이다. 


“그는 변발을 낚아채인 채 담벼락에 네댓 번 머리를 쥐어박혔다. 그제서야 건달들도 만족한 듯 득의양양하게 가버렸다. 아Q는 잠시 서 있었다. ‘아이들에게 맞은 거라구. 요즘은 정말 말세라니까.’ 그러고는 자신도 만족스러워 득의양양하게 가버렸다. 아Q는 자신이 마음속에서 생각했던 것을 늘 뒤에 가서 떠들어대곤 했다. 그래서 아Q를 놀렸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이같은 정신적인 승리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변발을 쥐고 흔들 때면 으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Q, 이건 애가 어른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다. 어서 사람이 짐승을 때린다고 말해봐’. 아Q는 두 손으로 변발을 움켜쥔 채 머리를 기울이면서 말했다. ‘버러지를 때린다고 하면 어떨까? 나는 버러지라구. 이래도 안 놔줄거야?’”


“그는 스스로를 자기 비하의 제 1인자라 여겼다. 자기 비하란 말만 빼면 어쨌든 제 1인자가 된다. 장원급제도 제 1인자 아닌가!”

 

“아Q는 즉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그는 오른 손을 불쑥 치켜올리고는 자신의 뺨을 두 차례나 힘껏 후려쳤다. 화끈거리면서 아프기까지 했다. 실컷 때리고 나자 그때서야 마음이 좀 후련해졌다. 어쩐지 때린 것은 자기고 맞은 사람은 남인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후엔 확실히 자신이 남을 때린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도 화끈거리고 아팠지만 그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자리에 누웠다."


 

이 정도면 가히 정신승리의 끝판왕이라 할만하다. 패배와 굴욕을 합리화하는, 극한 자기 경멸을 일삼는 그의 모습은 언뜻봐서는 코믹해 보이지만 우울하고 참담하다. 그의 정신승리는 현실부정, 도피에 가깝다. 근자감으로 똘똘 뭉친데다  부질없는 과거의 영화(있었는지도 모를)를 떠벌리며 남탓으로 일관한다. 스스로를 믿고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아Q의 모습을 통해 저자 루쉰은 근대 혼란기 중국의 모습을 그려낸다. 책에서 그런 불편함을 꼬집는 시각도 직접 드러낸다. 


“우리의 아Q는 그렇지가 않다. 그는 영원히 득의만만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점을 두고 중국의 정신 문명이 전세계의 으뜸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증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루쉰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봉건사회의 병폐나 근대화하지 못한 중국의 현실 비판도 있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어진 역사에서 나타난 인간의 모습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실 누구나 다 느끼지 않나. 내 안에 있는 저런 모습들. 


루쉰이나 이 작품에 대한 논문, 평전 등은 상당히 많이 나와 있는 것 같다. 중국 신좌파의 대표주자 왕후이가 몇년전 이 작품에 대해 새롭게 해석한 책 <아Q 생명의 여섯 순간>을 내놨고 서평도 있다. 기사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