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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스코프

일본에서 한국어 가르친 외국어 달인

by 신사임당 2018. 5. 22.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교수/ 우철훈 선임기자


로버트 파우저 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56)의 삶은 외국어 탐구와 궤를 같이한다. 고교 시절 배웠던 일본어를 시작으로 그는 한국어, 스페인어, 독일어, 불어를 섭렵했다. 라틴어와 몽골어, 북미대륙 선주민 언어인 루슈트시드까지 공부한 데 이어 지금은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맹자>를 읽으며 한자를 깨우쳤고, 시조를 통해 중세 한국어도 익혔다. 일본어와 한국어는 영어만큼이나 편하게 읽고 쓰고 말한다. 일본 대학에 머무르면서 한국어 강좌를 개설해 가르치는, 즉 미국인이 일본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특이한 이력도 쌓았다. 2008년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임용됐던 그는 한국 대학에서 최초로 ‘국어’를 가르치는 외국인 교수라는 기록을 세우며 주목 받았다. 언론매체에 활발하게 칼럼을 기고했고, 서울 서촌에 한옥을 짓고 살며 서촌문화운동을 이끌기도 했던 그는 2014년 고향인 미국 미시간으로 돌아갔다. 


현재 독립학자(Independent Scholar)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외국어 전파담>(혜화1117)이라는 책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평생 언어를 공부하고 연구했던 그가 내놓은 대중교양서로,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외국어 전파 경로를 탐색하고 그 과정의 문화사적 맥락을 살펴보고 있다. 언어와 관련된 여느 책들이 서구의 사례 중심이라면 이 책에는 동양 언어권의 사례도 풍성히 녹아 있다. 근 28년간 일본과 한국에서 머물렀던 그의 경험, 관심사와 무관치 않다. 340쪽에 이르는 이 책은 한국어로 썼다. 


“처음엔 조금 더 편한 영어로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외국어를 바라보는 나의 생각을 한국의 독자들과 직접 교감하려면 한국어로 쓰는 것이 더 보람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특히 한국에는 영어를 배우느라 고생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과연 외국어는 무엇인지, 외국어를 학습한다는 것이 어떤 역사적 맥락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생각해볼 계기를 갖는 것이 외국어를 배우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는 2년 전에도 한국어로 쓴 책 2권을 내놨다. 서촌의 한옥에 살면서 한옥 보존활동을 했던 과정을 기록한 <서촌홀릭>,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한국과 일본에 머무르며 정치와 사회를 들여다보고 해법을 고민했던 <미래시민의 조건>이다. ‘한국인이 알아야 할 민주주의 사용법’이라는 부제가 붙은 <미래시민의 조건>은 흔히 볼 법한 외국인의 한국 관찰기가 아닌 묵직한 제언인 데다, 그의 특이하고 흥미로운 인생 이력이 엿보여 재미를 더해준다. 그는 “교수생활을 할 때는 강의 준비하고 일상에 매여 아무 것도 못하다 그만두고 나서야 책을 쓸 수 있었다”면서 “한국에 살 때보다 오히려 미국에 산 지난 3년간 틈틈이 더 많은 한국의 지방도시를 여행했다”고 말했다.


올해 56세인 그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외국에서 보냈다. 1990년대 초반에 아일랜드에서 언어학 박사과정을 공부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청·장년기의 대부분을 일본과 한국에서 보냈다. 1980년대에 고려대에서 영어를 가르쳤고, 1995년부터 13년간은 일본 교토, 구마모토, 가고시마 대학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가르쳤다. 한국과 일본의 경험, 여기에 미국의 변화까지 포착해 낸 진지한 성찰은 그의 글과 말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2014년 미시간의 앤아버로 돌아갔을 때가 28년 만의 귀국이었어요. 이방인 아닌 이방인 같았지요. 가장 많이 달라졌다고 느낀 것은 ‘양극화’였습니다. 물론 전세계적인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풍요롭고 탄탄한 중산층이 떠받치고 있던 1980년대 초반의 기억을 갖고 떠나왔던 제게 현재 미국의 양극화는 다른 나라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졌어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절반 가까이가 흑인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집값 때문에 어딘가로 내몰린 거지요. 흑인과 백인이 함께 섞여 수업 받았던 현실이 ‘이상’이 되어가고 있는 거지요.”



그가 한국어와 일본어를 영어만큼이나 익숙하게 유지하는 비결은 하루를 3개 국어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 미국과 한국, 일본의 언론사 사이트에 접속해 뉴스를 보는 것이다. 단순히 뉴스를 읽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안을 놓고 진보지와 보수지가 어떻게 해석하는지 논조까지 꼼꼼히 비교한다. 


웬만한 외국어를 섭렵했음에도 그의 갈증은 끝이 없다. 현재의 계획표에는 러시아어와 중국어가 들어 있다. 이번 책(외국어 전파담)을 준비하면서 러시아어와 중국어로 된 문헌을 발견하게 됐고, 이를 직접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언어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과 흥미가 그를 지금까지 이끌어 온 원동력인 셈이다. ‘외국어 도사’ ‘외국어 달인’으로 불려온 그가 지금껏 수도 없이 들어왔을 법한, 뻔하면서도 답답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영어를, 외국어를 공부해야 하느냐고. 


“엄밀히 말해 저에겐 일본어도, 한국어도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거나 강제성이 있는 과목이 전혀 아니었어요. 그저 흥미롭고 재미있고 궁금한 대상이었지요. 그게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됐습니다. 재미와 호기심을 갖기만 한다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누구나 찾아낼 수 있거든요. 스펙을 위해, 특정한 목적을 위해 ‘강제로 해야 하는 공부’가 되다보니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반복되는 거지요.” 


그가 책에서 결론적으로 강조한 부분도 외국어에 대한 ‘관심’이다. 인공지능이 발달해 글과 말을 실시간으로 번역하는 시대가 온다면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매달리는, 도구로서의 영어 습득은 필요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는 “도구가 아닌,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평화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사회적 자본으로 외국어를 대한다면 공부하는 방식이나 자세도 달라질 것”이라고 조언한다. 학습자 입장에서 갖는 고민, 그리고 오랜 교육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외국어 교수법이나 학습법에 관한 책은 차근히 준비하고 있다. 



이에 앞서 그는 도시와 공동체, 젠트리피케이션 등 도시 재생과 미래를 다룬 책을 집필하고 있다. 서울과 더블린, 교토 등 그의 삶의 현장이었던 도시의 기록으로 한국의 독자들을 다시 만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