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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통신

미셸 우엘벡을 끊을 수 없는 이유

by 신사임당 2018. 4. 5.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미셸 우엘벡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결론적으로는 잘 안됐다. 특정 작가나 감독, 배우에게 꽂히면 그걸 덕질하는 수준으로 파는 편인데 미셸 우엘벡의 소설은 거진 읽은 것 같다. 읽을 때 마다 아 끊어야지,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이러면서도 자꾸자꾸 손이 가다 지금에 이르렀다. 최근에도 그의 책 <플랫폼>을 다시 읽었다.


우파 아나키스트라고 자처하는 그는 극단적 자유주의자로 봐도 무방하다. 현란한 지적 배경을 바탕으로 온갖 지식과 ‘썰’을 풀어내는 그의 화자들은 자기 비하적인 태도를 취하며 무심한 듯 툴툴거린다. 허무하고 냉소적인 특유의 분위기까지 더해지면서 비루한 척 하지만 그 바탕엔 은근한 깐족거림이 깔려있다. 아무튼 현실로 본다면 썩 기분좋은 방식은 아닌데도 그가 풀어내는 썰을 듣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되는건 도대체 뭐냔 말이다. 그런 내 자신을 보는 건 당연히 유쾌하지 않다. 짜증나면서도 ‘재수없는’ 그의 작품이 자꾸 보고 싶다. 아 또 짜증난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기분이 더러워지게 만드는 건 그의 여성관이다. 그의 소설에서 여성은 그저 성적 대상이다. 상당히 구역질 날 수준으로 묘사가 된 부분도 많다. 그가 여성의 심리적인 부분에 대해 관심을 쏟는다거나 섬세한 내면에 대해 이해하려는 의지는 없어보인다. 짜증날 정도로 무지에 가깝고, 그저 타자화된 대상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는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꿈꾼다. 결말로 갈수록 강하게 드러나는 사랑의 역할에 대한 환상은 조금은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게다가 인종차별주의적 성향은 어떻고.


현실에서 보면 전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을 스타일임이 분명한데 그가 글로 표현해내는 것들은 인간 내면에 있는, 그것도 주변에 널리고 흔한 허위의식과 위선을 아주 심술스럽고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까발리고 있다. 누구나 상상하거나 생각해봤음직 한데 미처 밖으로 내보지 못했던 생각들을 자신의 언어로 발설하면서 허위의식에 빅엿을 날리는 통쾌함 같은게 그를 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지치고 짜증날 때 희한하게도 그의 책을 들춰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소립자> <어느 섬의 가능성> <투쟁 영역의 확장> <지도와 영토> <플랫폼> <복종>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기발하고 기묘하지 않은 것들이 없다. 다른 작품들도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은데 <투쟁 영역의 확장>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기억난다. 섹스의 영역조차도 자유시장 경쟁체제의 대상이 되었음을 지적하며 내놓는 그의 제안들은 한마디로 골때린다. 섹스체제에 절대 빈곤층을 양산하는 불평등을 타개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하도록 투쟁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니.
 

정치적 성향과는 별개로 그의 작품에 상세하게 묘사돼 있는 음식이나 특정한 전문 영역에 대한 풍부한 내용들은 작가로서 매력적인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미술 문외한에 가까웠던 무식자였던 내게 <지도와 영토>는 미술계가 돌아가는 근본 시스템, 즉 작가와 컬렉터, 딜러의 3각 구조에 대해 많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도움을 줬고 <소립자>에서는 너무나 난해하기 그지없는 현대 과학철학을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들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봤던 기억이 난다. <복종>에 묘사된 그 수많은 이국적 음식들은 또 어떻고...
 


예전 어떤 모임에 갔을 때다. 짐을 꺼내느라 가방에 들어있던 그의 책 <플랫폼>을 꺼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모 인사가 약간 인상을 구기며 “우엘벡 좋아하냐”고 물었다. 난 “생각에 다 수긍하는건 아닌데 일단 책은 재미있잖아요”라고 했더니 그 다음부터 나와 별로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를 읽는다는 취향이 누군가를 규정하는 잣대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 주고 받은 편지를 엮은 <공공의 적들>에서 고등학교 교사가 우엘벡의 작품을 읽는 학생들에게 “위험하다”고 경고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취급주의’ 대상이긴 한가보다.

 

내가 알기로 우엘벡은 한국에 온 적이 한번도 없는데 그의 작품엔 뜬금포처럼 한국이 몇차례 등장한다. 서사를 전개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건 아니다.  예컨데 이런 식이다.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는 만나기로 한 누군가가 한국에 사업 때문에 출장을 가서 이번 모임에 못 나왔다거나, <지도와 영토>에서는 주인공이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데 한산한 레스토랑 안에 한국인 커플 한 쌍이 있었다는 뭐 그런 설명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지도와 영토>에 나오는 삼성전자 카메라와 한국 제품 설명이다. 주인공이 인터뷰를 위해 카메라를 샀는데 그게 삼성전자 제품이고 그 설명서를 살펴보는 부분이 묘사돼 있다. 사용설명서가 일본이나 독일 제품 사용설명서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감상을 써놓은게 너무 재미있다. 일단 한번 보자.


 “삼성전자는 사용설명서에서 ZRT-AV2 카메라를 선택한 고객을 대번에 수선스럽다 싶게 치켜세웠다. 소니나 니콘 같으면 찬사 따위,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이 회사들은 지나치게 프로의식에만 사로잡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적어도 거만이 일본인의 특성이 아니라면 말이다. 여하튼 이 탄탄한 일본 기업들은 차마 봐주기가 힘들었다. 독일인들은 설명서에서 합리적이고 지조 있는 선택을 한 것이라는 고객의 허구적 믿음을 깨뜨리지 않으려 노력했고, 실제로 벤츠의 사용설명서는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중략) 2010년대의 소비자가 좋아라할 만한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동차로는 기아와 현대가 있고, 전자제품으로는 LG와 삼성이 있다.”


그와 인터뷰 할 기회가 생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럴 기회가 생긴다면 그의 작품에 한국이 등장하는 이유는 물어보고 싶다. 그냥 언뜻 드는 생각으로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하면서 어느 정도 구매력은 있고, 그래서 출장지로서도 적절한 배경인데 이미지나 인지도 면에서는 일본이나 중국처럼 도드라지지 않기 때문에 대충 희소한 느낌을 준다... 뭐 이럴 것 같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