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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과 탐식

최초 기록 써온 일식 셰프 김선미

by 신사임당 2018. 4. 3.

 

파라다이스 시티 호텔 제공

 

 

셰프가 선망의 직업으로 떠올랐지만 여성 셰프는 여전히 드문 존재다. 그 중에서도 일식은 거의 ‘금녀’의 분야로 인식돼 왔다. 초밥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나 일류호텔 일식당에서 초밥을 만드는 여성 요리사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본다면 대다수가 고개를 갸우뚱할 가능성이 높다. 초밥 종주국인 일본에서 초밥집을 방문해본 이들도 마찬가지다.

무라카미 시게오의 만화 <초밥아가씨 사치>는 초밥 장인이 되는 꿈을 꾸는 여성 ‘사치’의 이야기다. 만화 도입부에서 초밥 장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치에게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며 말한다. “여자한테 초밥은 맞지 않는다니까!”

여성에게 초밥 만들기가 금기시됐던 이유로 꼽혀온 것은 체온이다. 배란 때문에 여성의 체온이 높아 손이 더 따뜻하기 때문에 신선한 생선을 만져서는 안된다는 것. 그런 믿음이 전통으로 쌓이면서 현재에 이르게 된 셈이다.


지난해 인천 영종도에 문을 연 파라다이스 시티 호텔 일식당 ‘라쿠’의 수장은 김선미 헤드 셰프(47)다. 국내 특급호텔 일식당 최초의 ‘여성’ 헤드 셰프. 일본에서조차 드물다보니 초밥을 만드는 그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메즈라시이’(희귀하다)를 외치는 일본인 관광객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일식 요리사들 사이에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20년 넘게 신라호텔 일식당 아리아케에 머물렀던 그가 지난해 파라다이스로 옮긴 뒤에는 일부러 영종도까지 찾아오는 고객들도 꽤 있다. 그를 만나 우선 체온과 초밥 사이의 상관관계부터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건 사람의 차이이지 성별의 차이일 수 없다”면서 “오랫동안 그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 왔지만 결국 편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일본 사람들도 이야기한다”고 설명했다.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말로 혼을 담아냈느냐는 거예요. 다른 건 다 극복하고 흉내낼 수 있어도 그건 불가능하거든요.”

경남 진주가 고향인 그가 처음부터 요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향에서 학교(관광과)를 졸업하면서 1991년 말 신라호텔 식음료팀에 입사했다. 처음 맡았던 일은 일식당 아리아케에서 서빙하는 것이었다. 고객들의 특징을 파악하고 응대하며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은 고되기 그지없는 업무인데도 그는 주변에서 ‘펄펄 날아다닌다’ ‘체질이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요리의 세계에 발을 디딘 것도 그의 이런 에너지 덕분이었다. 당시 신라호텔과 기술제휴를 하고 있던 일본 오쿠라호텔 명예회장은 “여성 일식 요리사를 전략적으로 키워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신라호텔 측에 했고, 관계자들의 시선은 ‘펄펄 날아다니던’ 2년차 ‘김선미’에게 향했다.

가뜩이나 고된 체력싸움의 현장인 데다 여성이 터부시되던 분야. 1993년 일식당 주방에 발을 디딘 뒤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하수도를 청소하는 것부터 온갖 궂은 일은 그의 차지였다. 실제로 상당수가 해병대 출신이던 신라호텔 일식당 주방은 군대를 방불케 했다. 말끝마다 ‘여자가’ 하며 무시하는 것도 일상이었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실력을 쌓으면 언젠가 된다”는 마음으로 버텼다. 희한하게도 고통스러운 만큼 호기심과 재미가 넘쳤다. 대학에 편입해 공부하는 한편 퇴근시간이 따로 없을 만큼 연습과 수련에 매진했다. 왼손잡이이던 그는 주방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오른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보통 주방에서 수련을 시작하고 7~10년이 지나야 ‘사시미칼’을 쥘 수 있지만 그는 몇 달 만에 칼을 쥐고 초밥 카운터에서도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초밥왕으로 유명한 스시효 안효주 셰프는 오랜 수련기간 동안 그에게 호랑이보다 무서운 스승이면서 든든한 지원자였다.

“제가 시작부터 일종의 ‘낙하산’이었잖아요(웃음). 운이 좋았어요. 특히 좋은 선배들에게서 잘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애정이 기반이 된 혹독함은 말하지 않아도 다르거든요.”


주방에서 어려움은 그러려니 했지만 간혹 손님들에게서 받는 차별과 모욕적 언사는 종종 상처가 됐다. 신라호텔 일식당이니만큼 단골손님 중에서는 경제·사회적으로 상류층 인사가 많다. TV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정치인부터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인들도 부지기수다.

“예전에 유명한 정치인이 오셔서 저를 보더니 여자가 여기서 초밥을 쥔다고, 기분이 상한 것 같더라고요. 대놓고 나가래요. 그런 손님들이 꽤 있었죠. 그런데 이런 일로 속상해 하고 억울해 하면 나만 손해다 생각하고 넘겼어요. 평소 같으면 펄펄 뛰며 화가 날 일이겠지만 오히려 그런 일들이 나를 채찍질하고 자극했던 것 같아요.”

2008년 신라호텔 아리아케에서 그는 차석 셰프인 ‘책임 주방장’으로 승진했다. 호텔업계에서 전례가 없던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고 세간의 관심을 끌었지만 워낙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웬만한 인터뷰는 고사했다. 당시 그와 함께 일했던 한 관계자는 “신라호텔에 있는 직원용 자료열람실에서 틈만 나면 살았던 분”이라며 “일본 요리잡지와 각종 요리책, 소설 등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가 자신의 일을 지금껏 해올 수 있었던 데는 가족들의 도움이 컸다. 시부모가 살림과 육아를 전적으로 도맡아줬기 때문이다. “제게 지극정성으로 헌신해주신 시부모님이 안 계셨더라면 과연 지금까지 일을 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싶지요. 여성이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게 마음 아파요. 그나마 저는 운이라도 좋았죠. 그런데 지금도 그런 상황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이 쪽에서 성장하는 여자 후배가 많지 않거든요.”

“셰프로 살면서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는 상투적이고 흔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가 하는 답은 “내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자괴감을 느끼는 매일의 순간들”이다.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자기관리에도 더없이 철저하다. 출퇴근시간이 아까워 신라호텔 근처로 이사했던 그는 지난해 영종도로 온 뒤에는 일주일에 한 두번 집에 간다. 미용실 가는 시간을 아끼느라 머리도 직접 자른다. 파운데이션 같은 화장품은 물론이고 음식에 향이라도 밸까 싶어 핸드크림도 한 번 발라본 적이 없다.


“요리에만 집중해도 시간이 부족하니 생활의 다른 부분은 단순화할 수밖에 없지요. 그 시간에 책 보고 연구해도 항상 시간에 쫓기거든요. 책을 수십 권씩 쓰고, 장인으로 칭송 받는 셰프들도 매일같이 창조적 영감이 부족하다고 고민하는 마당에, 제가 갈 길은 아직도 멀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