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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과 탐식

푸드립 8 멍게

by 신사임당 2017. 3. 22.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딸아이가 사춘기의 절정을 달리던 시절. 철딱서니 없던(물론 지금도 없다) 엄마인 나는 아이를 품어주기 보다는 사사건건 대립을 하며 감정적 줄다리기를 하기 일쑤였다. 일관성도 없고 감정기복도 심해 아이와 말다툼을 하다 오히려 아이가 지쳐 나가 떨어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싸한 분위기가 서로간을 채우다가 어이없게 몇마디 오가다보면 이내 언제 싸웠느냐는 듯 히히덕거리기도 한다. 때문에 딱 4살짜리 유치원생 노는 수준이라고 친정엄마에게 핀잔을 듣는 때가 많다. 아무튼 그렇게 한바탕 줄다리기를 한 뒤 딸아이와 나는 으레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를 해먹는다. 아이가 만들어 주는 스파게티를 먹으며 우리 모녀 애정의 깊고 진함을 확인하며 애틋함에 젖어드는 것이다. 투정부리듯 내가 만들어 달랠 때도 있고 아이가 먹을거냐고 물어볼 때도 있다. 어쨌거나 서로 푸닥거리를 하고 난 뒤 풀어진 상태의 멋적은 서먹함은 딸래미가 만드는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를 통해 회복되고 풀어진다.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닌, 그렇다고 딱히 의식하지는 않지만 일종의 리추얼이 된 셈이다.

리추얼로서의 음식 하면 천운영의 <멍게 뒷맛>을 떠올리게 된다. 이 소설은 그의 작품이 그렇듯 스산하고 잔인하다. 그것도 무척 사실적으로. 무덤덤하게 말하지만 곰곰 생각하면 소스라칠 법한 상황들 말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아파트 옆집에 사는 여자가 남편에게 매맞는 것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화자가 있다. 매맞는 여자는 남편에게 맞은 뒤 늘 멍게를 들고 찾아와 늘 화자와 함께 먹는다.여자의 비명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멍게향이 돌며 식욕을 느끼던 화자. 어느날 매를 피해 여자는 화자의 집 문을 두드리지만 화자는 냉정히 외면하고, 결국 여자는 죽는다. 여자가 죽고 난 뒤 삶의 의욕과 식욕도 함께 사그라든 화자. 이를 되살려보고자 광기에 넘쳐 멍게를 씹어대지만 자신의 삶도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작품에서 멍게는 두 사람 모두에게 다른 의미로서의 삶의 의지를 담아내는 매개다.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여자는 멍게를 손질하며 “멍게를 먹으면 살고 싶어져요. 그것도 아주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말한다. 반면 여자의 불행과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집에서 싸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내 입에서는 어김없이 멍게 향이 감돌았다. 당신은 나를 길들여 가고 있었다. 침을 솟게 만드는 멍게의 뒷맛처럼 당신이 맞거나 우는 소리를 들어야만 식욕이 돋아났다.’

출처/ 위키피디아

출처/ 위키피디아

책에선 멍게를 입안에 넣으면 바다향기 가득한 그 새곰한 맛, 바다가 들어차는 맛이라고 묘사했다. 정말 멍게처럼 바다향을 그대로 전하는 해산물이 또 있을까 싶다. 멍게를 그냥 먹거나 초장에 찍어 먹는게 전부였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여자는 멍게를 삼킨 뒤 물을 마신다. 그러면 단맛만 남는다는데 그렇게 먹어 본 적이 없어 좀체 상상은 안된다. 멍게는 일본 작가들도 여러 작품에서 풍미가 뛰어나다고 극찬한 수산물인데 국내에서는 멍게가 등장하거나 멍게를 묘사한 작품은 잘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심지어 소설가 한창훈의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에도 수많은 해산물이 등장하지만 멍게는 없었다. 아, 그러고보니 가끔씩 멍게가 등장하기는 한다. 그 ‘멍게’가 진짜 멍게가 아니라 사람이어서 그렇긴 하지만... 얼굴에 여드름이 숭숭 난 등장인물은 멍게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출처/ 위키피디아

출처/ 위키피디아

멍게는 영어로 Sea Pineapple이라고 한다. 생김새를 보면 정말 기막히게 이름을 지었다 싶다. 외국에서도 멍게를 먹는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영어 위키피디아를 보면 간혹 일본도 있지만 주로 한국에서 먹는 것이라고 아예 첫줄부터 나와 있다. 프랑스 청년 파비앙이 어느 방송에선가 프랑스에서도 멍게를 먹는다고 한 적이 있고, 어느 자료에 보니 칠레도 이걸 먹는다고 한 것 같다. 아마도 가장 많이 먹는 곳은 한국이지 싶다.

멍게를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지만 특유의 식감과 향 때문에 초기 진입장벽이 높은 편에 속한다. 싱싱한 날 것으로 먹는 방법이 가장 보편적이고 멍게비빔밥, 젓갈로 먹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멍게젓갈 맛에 환장한다. 벌써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보통 젓갈처럼 짜지도 않고 깊고 싱그러운 바다의 풍미가 그대로 담겨 있는 멍게젓갈을 따끈한 밥 위에 올려 먹으면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

돌멍게   /경향신문 자료사진

돌멍게 /경향신문 자료사진

갑자기 진짜 멍게가 등장하는 영화가 떠올랐다. 몇년전 상영됐던 <또 하나의 약속>이다. 멍게 한 접시를 두고 소주를 마시며 등장인물들은 이야기한다. 멍게는 처음에 뇌까지 있는 동물이었지만 어딘가 자리잡고 살면서 뇌를 자양분 삼아 자라는 식물로 변한다고. 즉 멍게는 알량한 자본이나 권력에 기대 양심과 정체성을 잃거나 잊고 살아가는, 영혼을 팔고 비루하게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삶을 비판하고 꼬집는 비유로 사용됐다.

속상하고 안타깝다. 얼굴을 묘사한 것이든 속성을 묘사한 말이든 멍게는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기에 멍게는 영양소도 풍부하고 독창적인 풍미를 지닌 맛난 먹거리다. <멍게 뒷맛>에서의 멍게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건 아니지만 소설 분위기가 너무 음울하다. 향긋하고 맛난 멍게의 이미지를 밝고 맑게 그려주실 분 누구 없으신지?

딱히 음식 전문지식이 있는 것도, 현장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늘어나는 뱃살을 고민하면서도 야식을 끊지 못해 끙끙대는, 밥 먹으면서도 먹는 이야기를 화제로 삼는 식탐 많은 40대입니다. 책을 읽을 때 음식 묘사가 나오면 눈을 번쩍 뜨곤 했지요. 작가가 묘사한 음식 맛을 떠올리며 입맛을 쩝쩝 다시곤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음식이 묘사된 문학작품은 음식 맛을 한참 상상하거나 직접 먹어보고 나서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던 탓에 한번에 죽 읽어낸 경우가 별로 없었습니다. 독서의 가장 큰 적은 식탐과 호기심이었다고나 할까요. [푸드립]은 ‘food+library’와 ‘food+drip’ 두 가지 뜻을 넣었습니다. 먹거리를 갖고 ‘썰푸는’ 장입니다. 책 속 음식 이야기와 함께 먹거리에 관한 온갖 수다를 떨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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