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며칠전 집을 정리하다 정말 깜짝 놀라 뒤집어질만한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1988년, 제가 고1이던 시절 유행했던 친구들과 나눠 쓴 앙케이트 노트!!.

예전 일기장이랑 졸업앨범 틈에 용케 자리잡고 살아남은 이 노트가 나타난거죠.
노트에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숫자, 좋아하는 과목 등등

이런식의 질문을 죽 써놓고 그 뒤에 답을 쓰는.

요즘 많이들 하는 100문 100답같은 겁니다.

아마 많이들 해보셨을거예요.
오랜만에 넘겨본 이 노트를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짜릿짜릿하기도 하고 오글오글하기도 하며

일순간 추억과 그리움,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됐습니다.

이 노트에 답을 빼곡히 채워준 친구들.

수현이, 수영이, 연희, 현경이, 수정이, 남숙이 등등...

생생하게 얼굴이 기억나는 친구도 있고 어렴풋, 가물거리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누래진 종이, 손발 오그라들만큼 유치찬란한 질문과 답들. 아 그립네요.

더 아쉬운 건 이 친구들 대부분이 현재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 제 잘못이고 부족함 탓이라 더 속상하기도 하고,

뭐하느라 이리 정신줄 놓고 살았나 싶기도 하네요.

혹시나 그래도 조심스럽게 기적을 기대해 보려구요.

이 노트, 그리고 이 안에 온갖 유치찬란한 100여개 질문에

일일이 답을 쓰며 서너시간씩 붙잡고 있던 친구들아...

이거 기억나는 사람????

 

좋아하는 선생님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한 방법을 함께 고민하던,

바라고 바라던 영화를 보기 위해(19금 아닌 ‘시네마 천국’ 류의 영화들)

야자 땡땡이를 칠 핑곗거리 찾으며 며칠간 작전을 꾸미던

소박하고 소심한 친구들.... 보고싶네요.

이 친구들이 해준,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답변들을 모아봤습니다.

 


**가장 감명깊은 책과 시는?
(이런 질문을 넣었던 것을 보면 우리 땐 지금보다 시와 책을 참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요즘이면 진지빠느니, 고상한척이니 비난이 쇄도할 질문이지만

그 시절엔 소위 ‘날라리’들도 좋아하는 시 한수 정도는 있었습니다.)

책 중에서는 데미안을 답했던 친구들이 많았네요.

다음으론 어린 왕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또 제법 눈에 띈 책들로는 생의 한가운데, 수레바퀴 밑에서,

탈무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등이 있었습니다.

시는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많았고요

조지훈의 ‘사모’, 김남조의 ‘평행선’, 김초혜의 ‘사랑굿’,

김숙경의 ‘너 그리고 나’ 등이 자주 보입니다.

포우의 ‘애너밸리’, 롱펠로우의 ‘인생예찬’,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도 꽤 있구요.

가만 보니 생각납니다.

‘가지 않은 길’이 상당히 유행했던 이유. 

대학진학을 앞두고

고등학생으로서의 고민을

그 시에 투여하거나

혹은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많이들 입에 올렸던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운동선수는?
이건 뭐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예측 가능한 답변이겠죠.
농구는 당연히 이충희, 박수교, 허재
배구는 장윤창, 최천식, 김명진
축구는 변병주 최순호
외국 선수로는 아무래도 88올림픽이 있었던 만큼 

칼 루이스, 매트 비욘디, 그렉 루가니스, 미하엘 그로스, 보리스 베커 등이 있었네요.

그러고보니 아이돌이 귀하던 그 시절 외국 테니스 선수들도 덕질의 대상이었어요.

서독의 보리스 베커 정말 대단했었다는...

 

경향신문 자료사진인데 오른쪽이 베커예요.

 

 

매트 비욘디랑 미하엘 그로스는 각각 미국과 서독 수영선수였는데

그때 우리 반에서 양 선수의 팬덤 사이에 엄청난 긴장감이 고조되기도 했었죠...

여자 선수는 원조 걸 크러쉬라 할 만한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 선수.

 

**좋아하는 노래
이 친구들 답변을 보니 이렇습니다.
조용필 노래 전부.
소방차 노래라면 다.
이선희 노래.
조지윈스턴 곡들이라면.
아마 이런 답변에서도

음원이 아니라 테이프를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당시 문화가 드러나는 듯 하네요.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은?

가장 많은 프로그램은 쇼 비디오 자키였고

다음으론 토토즐, 블루문특급, 퀴즈 아카데미 순입니다.
전 그 당시 쇼 비디오자키를 한번도 보지 않아

천연기념물 취급을 받았었는데

TV를 안보는 범생이가 아니라

난 끝까지 니들 다 보는거 안보는 기록을 세워보겠다는

똥고집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가장 인기 있던 것이었지만 전혀 어떤 기억도 할 수 없다는...ㅠㅠ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
단연코 <갈채>의 쥬시카 에도니가 원톱이었습니다.

김영숙이라는 만화가가 썼던 이 작품은

상당히 오랜기간 연재되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너무나도 산뜻하고 재미있게 시작됐던 스토리는

회차가 갈수록 묘하게 꼬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걷잡을 수 없는 안드로메다로 가는,

소위 말하는 막장드라마가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기다리다 지치고, 황당한 스토리에 지쳐

결국은 완독을 포기하고 말았지요.

스토리 뿐 아니라 초기 연재본과 나중에 나온 것은

그림이 완전히 달라져 아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작가 김영숙씨가 남자라는 소문들도 한참 돌았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를 열광시켰던 만화 주인공이 있었으니

바로 <1999년생>의 크리스입니다.

고 1때 친구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르네상스>라는 만화잡지가 있었습니다.

아마 최초의 순정만화 잡지였을 거예요.

여기에 신일숙의 <1999년생>, 황미나의 <엘 세뇨르>,

김혜린의 <테르미도르> 등이 연재됐던 것 같은데

특히 <1999년생>에 많이들 꽂혀 있었어요.

1999년에 태어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SF 로맨스 스타일 만화였죠.

그 당시 1999년은 첨단 과학이 발현할 꿈같은 미래였습니다.

과학 그림그리기만 하면 알약하나로 음식을 대체하고

해저에 도시가 만들어지고 ....

1985년 개봉됐던 <빽투더 퓨처>가 연상한

30년 뒤의 미래랑 비슷한 상상속의 세상이었죠.

그러고 보니  가수 민해경의 ‘서기 2000년’이란 노래도 갑자기 생각나네요.

이 대목에서 이 노래 가사를 읊지 않을 수 없네요.

당시 유토피아적 미래를 상상하던 희망가였다고나 할까.

정말 열심히들 춤추며 따라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저희들이 초등학교 시절에 한참 유행했던 곡입니다.

 
‘서기 2000년이 오면 우주로 향하는 시대

우리는 로케트타고 멀리 저 별사이로 날으리 

그때는 전쟁도 없고 끝없이 즐거운 세상

그대가 부르는 노래 소리 온 세상을 수놓으리 

사바 사바 그날이 오면은  사바 사바 우리는 행복해요 

다가오는 서기 2000년은 모든 꿈이 이뤄지는 해’

 

아마 이런저런 이유로 이 가사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분들 많으실듯...

 

 

 

 

여하튼 1999년생은 당시 우리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만화였었고

막연하게나마 당시의 우리들은 단체로

1999년에 태어날 아이들이 인류의 구원자가 될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음........................

제 딸이 1999년생이네요. 

그저 웃습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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