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평소 휘뚜루마뚜루 해치웠던 명절노동의 흔적이 올해 유독 길게 이어지는 건 순전히 믹서 때문이다. 양파며 배, 감자 등을 일일이 갈아 양념을 만들고 전을 부쳐야 하는데 믹서 없이 강판에 갈기를 며칠간 했더니 지금도 어깨가 천근만근이다. 추석 며칠 전 고장난 믹서를 버리고 점찍어뒀던 제품 가격을 보니 20만원은 족히 넘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무이자 3개월 카드 할부로 사려는데 한도 초과였다. 지난 여름 휴가지 여수에서 식탐을 못 이기고 과도하게 긁어댔던 대가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엄청난 과소비를 했던 건 아니다. 수년 전 낭패를 경험한 뒤 카드한도를 분수에 맞게 줄였던 게 이런 돌발상황의 원인이 됐다. 게다가 유독 지난달에 집안 경조사며 급한 불 꺼야 할 일이 몰렸었다.
 

 

“그러니까 건강 챙겨. 우리가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뭔 다른 자산이 있냐. 난 김치가 얼어붙는 저놈의 김치냉장고를 3년째 끼고 차일피일하고 있어. 월급은 빤하지, 나갈 데는 많지. 여윳돈이라도 생길라치면 어쩜 그리 희한하게 애먼 돈 쓸 일이 생기는지…. 백화점 가본 지가 삼만년이다.” 10년 전 2억원을 대출받아 기세 좋게 강남에 집을 마련했던 친구에게선 불 같은 넋두리가 쏟아졌다. “강남 살면서 엄살이 심하다”고 하자 금세 목소리는 풀이 죽는다. “맞벌이 20년 생각하고 질렀는데 이게 뭔가 싶다. 한 푼이라도 허투루 안 쓰려고 궁상을 떠는데 이 짓을 10년도 넘게 더 해야 하잖아. 물론 남편이나 나나 중간에 안 잘린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만.”
 
안다. 이 친구나 나의 이런 푸념도 사치라는 걸. 잘 먹고 잘 입는 건 아니지만 정규직 맞벌이로 살아온 우린 최소한 계획이란 걸 세우고 살 수 있었다. 서울 변두리든, 수도권 어디든 내집을 마련했고 건강보험이며 연금저축에 관심 가질 여유도 있었다.
 
며칠 전 단골 커피숍에 갔다가 바리스타로 일하는 청년을 오랜만에 봤다. 한동안 안 보이길래 그만둔 줄 알았더니 교통사고가 났었단다. 두 달 가까이 치료를 받았다는 그에게 걱정한답시고 건넨 질문은 고작 실손보험 가입 여부였다. 그러자 그는 씩 웃었다. “보험 들 여유가 있으면 저축이라도 좀 더 하겠죠. 한달에 130만원 받아서 월세 내고 살기도 빠듯해요. 당장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20, 30년씩 어떻게 꼬박꼬박 돈을 넣겠어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더러워서 때려치우겠다’는 지인들에게 “그래, 어디 가서 한달에 200만원 못 벌겠냐”며 맞장구쳐줬던 말들이 얼마나 세상물정 모르는, 오만한 투정질이었나 싶다. 그러고 보니 10년째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는 동네 언니는 월급이 채 180만원이 안됐고 취직준비하며 백화점 주차장에서 아르바이트 중인 친구 동생은 한달에 100만원도 못 받는다고 했다. 추석 당일에도 일한 동네 마트 점원은 “반찬값이라도 벌려면 별 수 있겠냐”고 했다.

1일부터 블랙프라이데이가 시작됐다. 백화점부터 동네시장까지 대대적으로 참여하는 세일이라는데 아예 정부가 팔 걷고 앞장섰다. 나와서 돈 좀 쓰고 카드도 긁으란다. 소비를 진작시켜 돈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주변에 돈 쓸 사람이 없다. 번듯한 직장이 있대도 대출금 갚기 바쁘고, 대출이 없어도 불안해서 돈을 쓸 수가 없다. 150만원도 안되는 월급으로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도 버겁다. 한 페이스북 친구는 “왜 없어도 그만인 모피, 아웃도어, 전자제품 같은 것만 세일하느냐”면서 “병원비, 학원비, 등록금도 세일에 동참하라”고 글을 올려 ‘좋아요’ 세례를 받았다.
 


스마트폰에 깔린 앱으로 각종 쿠폰이 날아오고 구매욕구를 자극하는 유혹이 도처에 넘실댄다. 사고 싶은 게 너무 많고 순간순간 결제버튼을 누르고 싶지만 애써 인터넷 접속을 차단한다. 황금을 돌처럼 여길 만큼 득도해서가 아니다. 황금과 돌의 차이만큼이나 빤히 보여서다. 달콤한 블랙프라이데이 끝에 우리들 앞에 남는 것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블랙홀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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