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은의 잼있게 살기

 

싱어송라이터 조동희와의 인터뷰

 

푸른곰팡이에서 나온 옴니버스 앨범 <강의 노래>는 많은 분들이 흥분과 기대감을 갖고 기다리던 앨범입니다.

여기에 참여한 15명의 아티스트들은

예전 하나음악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활동했던 분들입니다.

유희열씨는 공개적인자리에서 여러차례 하나음악이 자신의 음악적 감수성의 원천이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동익씨의 필체까지 따라하려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네요.

 

이번 앨범은 12년만에 나온 옴니버스 앨범입니다.

참여한 15명의 아티스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좌장인 조동진과 조동익, 조동희 삼남매

하나음악을 대표하는 여성보컬리스트 장필순

또 '너를 사랑해'의 한동준

20년전 초창기 멤버로 활약했던 정원영, 이무하

이와 함께 이규호, 박용준, 오소영, 고찬용, 이경 등

하나음악과 함께 했던 익숙한 뮤지션들.

또 새롭게 합류한 젊은 아티스트인

송용창, 소히, 새의전부 등이니다.

앨범에 대한 소개는 포털 사이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들에 대한 자료들을 좀 정리해 보려구요.

요즘 젊은 가수들에게 밀려

포털사이트에서 이분들의 기사를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참고가 될만한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조동진 님.

 

사진은 푸른곰팡이에서 주신 겁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조동진님입니다. 가장 최근 사진이죠.

 

 

1995년 11월 3일   한겨레 기사입니다

 

 

◎고요한 완전주의자가 벼린 맑고깊은 내성의 아름다움

 1978년에 홀연히 등장한 우리 시대의 음유시인 정태춘의 데뷔작 〈시인의 마을〉의 노랫말을 누더기로 만드는

공연윤리위원회의 폭력이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맑고 깊은 내성의 아름다움을 벼려 온 또 한 명의 ‘통기타를 든 시인’이 조용히 등장한다.
유신 말기의 상징이 되어 버린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과 김트리오의 〈연안부두〉를 전위에 내세운 트로트가

재집권을 향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한편으로,

미국에서 불어 온 디스코의 열풍은 들고양이들의 〈마음 약해서〉와 나미의 〈영원한 친구〉,

그리고 혜은이의 〈제3한강교〉 등을 통해 기세를 올리고 있던 터에

조동진의 이 과묵한 시편들은 도심의 외딴 섬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전지전능한 권력을 장악한 네트워크에 기대지 않고서도

이 앨범과 이듬해에 이어 나온 두번째 앨범(그의 걸작 〈나뭇잎 사이로〉와 〈어둠 속에서〉를 담은)을 통해

말 그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지자층을 형성함으로써

주류권의 송창식과 함께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청년문화의 정신을 수호하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그의 승리는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승리가 송창식의 경우처럼 다만 자신의 전리품으로 한정되는 데 그치지 않고

80년대 중반의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정신의 역사적 전제가 되었기 때문이며,

그를 정점으로 하는 이른바 ‘조동진 사단’이 형성됨으로써

1995년의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상업주의적 매너리즘에 대한 ‘진지한 야경꾼’의 참호가 마련된 까닭이다.
이와 같은 내공이 결코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영화감독 조긍하의 아들로 대학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지만 60년대의 록과 모던 포크의 세례를 받고 방향을 선회한 그는

1972년 양희은의 목소리를 통해 〈작은 배〉를 발표하고

뒤이어 〈다시 부르는 노래〉를 이수만과 서유석에게 제공하면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70년대가 저물도록 미련하다 싶을 만큼 침묵의 정진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행복한 사람〉과 〈불꽃〉을 앞·뒷면의 필두로 삼아

〈겨울비〉 〈긴긴 다리 위에 저녁 해 걸릴 때면〉 〈흰 눈이 하얗게〉 같은

어디 하나 버릴 것 없는 정결한 텍스트를 분만한다.

그리고 이미 발표했던 〈작은 배〉와 〈다시 부르는 노래〉를 각 면의 마지막에 배치한 것도

이 고요한 완전주의자의 면모를 은근히 엿볼 수 있게 만든다.
그에게 선율과 리듬, 그리고 인공적인 제반 효과는

이 때나 네번째 앨범을 발표한 1990년에나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 옥타브 남짓한 협소한 음역 안에서,

그리고 결코 신선하지 않은 3박자의 왈츠 리듬을 주조로 삼으면서도

마치 초야의 오두막을 고집하는 중세의 사림처럼

비천한 순응주의와 성공 지상주의에 저당잡힌 한국 대중음악계에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이 깊은 우물의 울림이야말로 우리 대중음악의 최후 저지선의 일익이며

현재까지는 그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앨범의 마지막 노래 〈항해〉의 결말처럼

 ‘오랜 항해 끝에 찾은 상처 입은 우리의 자유’인 것이다.

<강헌 대중음악평론가>

 

이번엔 조동익 님 입니다.

이분은 현재 제주도에 머무르고 계시죠.

거의 외부와의 접촉도 않으시고 언론과도 만나지 않습니다.

이번 <강의 노래> 작업 때도 서울로 한번쯤 올라 오셔서 뒤풀이도 하실만했건만

제주에서 한 작업을 파일로 보내고

모습은 드러내지 않으셨다고 하네요.

 

이 사진은 경향신문 자료사진에 있는건데 

 2007년 모습이라고 설명이 돼 있습니다.

 

 

 

 

한겨레  1994년 9월 9일

 

조동익씨 연주곡·노래 담은 음반 선보여가수들에 가려 있던 연주가들이 대중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기타리스트 이병우씨는 최근 서울 동숭동에서 ‘귀국 연주회’를 가졌다.

‘현역’으로 활동하다 불쑥 오스트리아로 떠난 그가 유학을 끝내고 와 가진 첫 독주회는

그의 오랜 동료 조동익씨를 놀라게 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는 것이 베이스 연주자로, 편곡자로

국내 대중음악계에 탄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30대 음악인의 솔직한 이야기.

 대중음악의 저변이 그만큼 확대됐음을, 음악 자체도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첫 독집음반 〈조동익­동경〉과 영화 〈장미빛 인생〉의 영화음악 음반을 냈다.

〈장미빛 인생〉의 노래 〈아침을 맞으러〉는 가수 김장훈씨에게 맡겼지만,

8곡 가운데 연주곡과 노래가 꼭 반반인 독집의 노래는 자신이 불렀다.

그는 가수가 되려는 것인가.
“뭔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어서 노래를 했을 뿐”이라며 조동익씨는 웃는다.

〈엄마와 성당에〉 〈노란 대문(정릉배밭골 ’70)〉 등을 통해

그는 자신의 유년기 70년대를 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정릉에 아직 배밭이 있고, 칠성이네 아버지가 거름을 져 나르던 밭이 있던

그 연대(〈노란 대문〉)를 향한 시선에는 순수에 대한 향수가 담겨 있다.

그리고 따뜻해서, 그보다 먼저 음악활동을 시작한 형 조동진씨의 노래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관심은 ‘연주가 조동익’에게 기운다.
“연주곡은 워낙 해보고 싶었다.

86년부터 이병우와 함께 두번 낸 〈어떤 날〉은 노래집이었지만,

그뒤 둘 다 연주에 몰두했다.

92년에는 김현철·손진태·함춘호랑 넷이서 ‘야샤’라는 그룹을 만들고

그 이름으로 연주음반을 만들었으나 빛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찾아서 듣는 이들이 따로 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음반으로 남았다.
〈동경〉 〈동쪽으로〉 등 인상주의적 색채의 〈조동익­동경〉 연주곡에는

피아노의 김광민, 기타의 이병우씨 등이 참여했다.

정원영(서울예대 교수·실용음악과)·함춘호·손진태씨와 함께 한국 ‘세션’의 제3세대를 이루는 이들이다.

어떤 점에서 이들은 행복하다.

조원익·이호준 등 바로 이전 세대, 그들보다 앞선 ‘이봉조 악단’ 시대의 연주가들과 달리

노래의 연주부분에 귀기울이는 청중들, 그리고 연주음악 자체에 첫 관심을 갖는 애호가들을 지녔기 때문이다.

소리에 예민해진 청중을 의식한 프로듀서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조동익 독집도 그런 변화의 산물이다.
이 세대에게 고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서양악기로 서양음악을 하다보니 남의 밭에서 농사를 짓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고 조동익씨는 털어놓는다.

그런 고민보다 더 절실한 것이 한때 있었다.

‘독학’으로 시작한 자신의 연주가 “제대로 되기나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이병우·김광민·한상원·정원영씨 등 대중음악 연주계의 이른바 ‘해외유학파’도 그런 상황이 만들어낸 셈이다.

이병우씨는 빈 음악원에서, 김광민·정원영·한상원씨들은 미국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수학하고 돌아왔다.

국내의 음악교육제도에는 이들의 갈증을 해소해줄 곳이 없었다.
조동익씨는 이 동시대 연주자들을 가리키며 “우리 연주기량도 많이 향상됐다”고 흐믓해하지만,

막상 자신의 연주에 대해서는 “아직은 시작단계”라고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소리를 좀더 연마하는 것, 곡을 쓴 이들의 음악을 정확히 표현해내는 것이 우선과제라고 그는 자신을 다그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제의 뒷줄에 항목 하나를 조심스럽게 배치한다. 그것은 “한국적인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음은 한동준님입니다.

 

사진은 경향신문 자료사진방에서 가져온 2003년 사진입니다. 

 

 

 

 

매일경제 2009년 10월28일 

 

28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내 이야기’를 담아 첫 앨범을 냈다.
그리고 20년 후. 그 사이 3장의 앨범이 더 쌓였지만, ‘데뷔 20주년’을 맞은 중견가수로서는 앨범 발매가 참 박하다.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너를 사랑해’ ‘사랑의 서약’ 등 주옥같은 발라드 넘버로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한동준 얘기다. 앨범만 박한 것이 아니었다. 단독 콘서트도 15년만이다.
분위기 있는 발라드 가수로 각인되어 있지만 한동준은 꽤 유쾌한 사람이다. 그의 '밝고 경쾌한' 면모는 매일 오후 2시 CBS 라디오 ‘한동준의 FM팝스’를 들으면 단박에 느낄 수 있다. 거침없고 시원스런 그의 진행은 낮 시간의 나른함은 단숨에 날려버린다.
단독 콘서트와 새 음반 준비에 한창인 그를 만났다. 한동준에게 시간은 멈춘 것일까. 10년 전, 라디오 부스에서 만났을 때보다 그는 에너지가 넘쳤다. 말쑥한 정장 차림을 하고 나타난 그는, 요즘 회사원처럼 방송국을 드나든다.
그의 분위기 있는 히트곡들로 보면, 풍경 좋은 전원에서 곡을 쓰고 악보를 찢고 있어야 할 듯 싶지만, 그는 꽤 '바른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좋아하던 술도 “예전만큼은 자주 마시지 못한다”며 씽긋 웃어보였다. 그는 “이번 공연을 기점으로 가수 인생에 전환점을 마련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눈이 아이처럼 빛났다.

“내 노래들은 모두 내 얘기다. 내가 만들기도 하고, (노래를) 받기도 하지만 받을 때도 노래가 아무리 좋아도 공감할 수 없으면 그 노래 안 한다. 제 상황에 맞고 제 얘기라고 생각했을 때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앨범이 4장밖에 안되지만 한곡 한곡들이 전부 내 얘기다.”
●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굳이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더라도,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88년에 ‘노래그림’으로 앨범을 발표하고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새들처럼’을 만든 지근식씨와 ‘건축가’로도 유명한 양진석씨와 멤버였다. 91년도에 첫 솔로앨범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도’를 발표했지만, 정확히 따지면 88년 데뷔했으니 20년이다. 데뷔 10주년 때는 암울했던 시기였다. 5~6년 동안 거의 노래를 안 하고 지냈다. 방송을 주로 하다보니까 (세상사에) 이래저래 치이기도 하고, 음악인으로 보다는 사회적인 활동을 하면서 지쳐갔다.
● 20주년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걸어온 행보와 달라지는 것이 있나.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여태까지는 게으르고 나태하고 무기력한 세월이었다면, 이번 공연을 계기로 부지런해지고 대중들 앞에 당당히 서는 저로 탈바꿈하고 싶다. 공연을 15년만에 한다. 공연은 너무 하고 싶었는데, 여건이 안 되어서 못했다. 계획적으로 살아가는 스타일이 아닌데다. 요즘 가요계에는 어쿠스틱 노래를 하는 가수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내가 ‘너를 사랑해’ 발표했을 때도 그런 분위기였다. 나하고 김광석씨 하고 분위기를 많이 바꿨던 것 같다. 그런 분위기를 좀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대로는 늙어갈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
● 그동안 공연을 하고 싶었는데, 여건이 안 되어서 못했다는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랜만에 하는 거니까 괜찮은 세션들과도 하고 싶었던 거다. 공연 기획자들과 얘기를 해보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공연을 못하는 거다. 반면, 저대로는 공연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이었고. 그런 것들이 상충되어서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백암아트홀 측에서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웠고, 세션과 가수, 기획자들이 조금씩 양보해 삼박자가 골고루 맞춰졌다.
● 하지만 한동준이란 가수는 어디선가 공연을 많이 해 왔을 듯 하다. 주변에서 성화가 더 심했을 것 같은데.
특히 동료들이 답답해했다. 동물원에 박기영이란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 친구들도 같이 공연을 하자고 종용하고 그랬다. 하지만 일단 내 단독 공연을 하고나서, 그 다음에 뭔가를 하고 싶었다. 공연을 한번만 제대로 보여준다면, 그 다음부터는 소극장이라도, 하다못해 카페에서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한번이 지금이다.
● 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은 공연이 될 것 같다. 어떻게 꾸밀 생각인가.
음악과 인생이 결합된 공연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음악 위주의 공연이 될 것이다. 음악과 관련된 20년 세월들을 함께 얘기하면서. 내 노래들은 모두 내 얘기다. 내가 만들기도 하고, (노래를) 받기도 하지만 받을 때도 노래가 아무리 좋아도 공감할 수 없으면 그 노래 안 한다. 제 상황에 맞고 제 얘기라고 생각했을 때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그러다보니 앨범이 4장밖에 안되지만 한곡 한곡들이 전부 내 얘기다. 그런 얘기들을 하면서 정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 지금도 한동준의 노래를 여러 가수들에게 리메이크 되고, 불려지지만 정작 한동준의 목소리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다. 이번 공연을 기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할 생각인가.
바로 그거다.(웃음) 그럴 것이다. 정규앨범은 법적인 문제가 있어서 싱글로 계속 낼 생각이다. 지금 녹음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제 앨범은 아니다. 창작의욕이 많이 떨어졌었는데, 앞으로 좋은 노래를 많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좋은 노래라는 개념이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그런 의욕이 자꾸 생겨야 만들게 된다. 올해 안에 내년 초에는 독집 싱글을 발표할 생각이다.
● 히트곡들을 보면 육식남 보다 초식성에 가까운 면모들이 있다. 여성들이 느끼는 섬세하고 소박한 감정들의 조각들.
내가 3형제 중 막내다. (부모님이) 딸인 줄 알고 낳으셨다. 낳을 때도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여성적인 취향이 있다. 예를 들면 그릇을 좋아한다거나, 가구를 좋아한다거나.(웃음) 백화점에 가도 그런 매장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구경은 해도 난 죽어도 안 산다.(웃음) 하루 종일 구경하는 것만 좋아한다. 그런 성향들이 음악 속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내 얘기를 하다보니 많은 것을 쌓아놓아야 앨범이 나온다. 쌓아놓는 과정들이 점점 길어지는 것 같다. 첫 앨범은 28년 동안 살아오면서 느끼고 쌓아왔던 것을 담았지만, 그 이후엔 2년, 3년 걸리고 그 다음 4집 앨범은 8년만에 나왔다. 그 중간에 ‘엉클’이라는 앨범이 나오기도 했지만.”
● 음악에서 주는 이미지는 부드럽고, 서정적이다. 정적일 것 같기도 하고. 자신의 실제 삶은 어떤가.
지고지순한 데가 있다. 어릴 적부터 도덕적,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노래 속에 녹아들게 된다. 결국엔 내 얘기인 노래는 그렇게 불러놓고, 생활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다보니 그런 것에 노예가 되기도 하고.(웃음) 그런 것들의 반복인 것 같다. 지난 번에 방송에서 “노래 때문에 어디 가서 바람도 못 피겠어요?”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한편으론, 다혈질적인 측면이 있다. 불의를 보면 특히 못 참는다. 사실, 진실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다보니 오류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면 옳았던 경우도 많다.
● 가수인생 20년 동안, 솔로앨범 단 4장을 냈다. 너무 야박하지 않나.(웃음)
일단 게으른 거고. (음악으로) 내 얘기를 하다보니 많은 것을 쌓아놓아야 앨범이 나온다. 쌓아놓는 과정들이 점점 길어지는 것 같다. 첫 앨범은 28년 동안 살아오면서 느끼고 쌓아왔던 것을 담았지만, 그 이후엔 2년, 3년 걸리고 그 다음 4집 앨범은 8년만에 나왔다. 그 중간에 ‘엉클’이라는 앨범이 나오기도 했지만.
● 너무 완벽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완벽은 아니다. 내가 완벽주의자는 아니다. 내 얘기를 하고 싶을 때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랄까. 다만, 친한 조동진씨나 장필순씨의 영향 때문인지 별로 조급해하지 않고, 이 시기에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뭔가 꽉 차 있을 때는 앨범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은 든다. 멜로디도 멜로디지만, 가사가 굉장히 중요하다. 앨범을 내면서 맨날 쓰는 가사를 쓴다는 생각이 들더라. 정말 멋진, 깊은 의미의 가사를 쓰려면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린다.
● 음악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뭔가.
전달력, 공감이다. 내 마음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작곡하는 친구들보다 노랫말을 중요하게 여긴다. 곡을 만들 때 가사를 먼저 쓰거나 함께 쓰려고 한다. (타 가수들을 보면) 심한 경우엔 녹음할 때까지 가사가 안 나오는 경우도 많더라. 그렇게는 안하려고 한다. 적어도 녹음할 때는 가사를 다 쓰고, 연주자들이 어떤 느낌인지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곡과 가사가 따로 노는 느낌의 노래가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음악 하는 사람의 자세는 아닌 것 같다.
● DJ 한동준으로 라디오 부스에 있는 시간 말고, 지난 세월동안 무얼 하면서 보냈나.
막 지냈다.(웃음) 맨날 술 먹고. 술은 참 좋아하지만, 요즘엔 체력이 고갈 상태여서 자주 먹지 못한다.
● 한동안 성대결절로도 힘들었다고 들었다.
내 노래는 불러보면 쉬운 노래들이 아니다. 소리를 꼭 질러야 혹사시키는 건 아니다. 약하게 불렀다가 강하게 부르는 느낌들을 반복하면서 무리가 왔던 것 같다. 우리나라 가요계라는 것이 앨범을 내게 되면 하루에도 몇 번씩 노래를 해야 하는 분위기다.
● 라디오 DJ를 매일 하다보면 회사원처럼 살 수 밖에 없지 않나. 자유로움을 구속 당하기까지 적잖은 고민이 있었을 듯 하다.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고 스트레스도 엄청 받았다. 결혼하면서 마인드콘트롤을 하게 된 것 같다. 생활인이 되니까.(웃음) 결혼하기 전에는 “난, 예술가야” 이런 생각을 했지만, 결혼한 다음엔 (가족을)먹여살려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니까...(웃음) 그러다보니 열심히 하자 싶었고, 열심히 했다. 열심히 즐기면서 하다보니 반응도 달라지더라. 그 전까지는 DJ로서 평가가 좋지 않았다. 6개월만에 다 잘리고.(웃음) 그 이후엔 평가가 좋아졌다. 청취율도 올라가고 그런 것을 보면서 마음가짐이 중요하구나 싶었다.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다들 놀랐다. 생활이 전반적으로 결혼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흔 다 되어서 10년 연인과 결혼했다. 10년 연애하는 동안 100번 헤어졌다.(웃음) 현재 결혼 8년차로, 딸 둘이 있다.”
● 93년부터 진행해온 DJ는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
(한동준은 불교방송 ‘밤의 창가에서’를 시작으로 CBS ‘꿈과 음악사이‘ MBC '두시의 데이트’ SBS '한동준의 뮤직파워’ 교통방송 ‘마이웨이’을 거쳐 현재 CBS ‘한동준의 FM팝스’를 진행하고 있다.)
치유의 시간이다. 요즘엔 CBS에서 팝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청취자와의 교류감이 크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서 방송국에 갔다가도 2시간 진행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최근엔 특히 재미를 많이 느끼고 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도 굉장히 만족스럽다. 팝송 프로그램인데다 예전에 팝 컬럼니스트가 꿈이었기에 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하고 잇는 거다.
● ‘사랑의 서약’은 현재까지 가장 많이 불리는 축가 중 하나다. 축가는 많이 불렀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처음부터 안했다. 내 형제들에게도 안 불러줬다. 그 다섯 커플은 경제적으로든, 부모가 반대했든,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경우에만 해줬다. 연예인 결혼에 불러준 경우는 없다.
● 순정적인 노래를 불러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법 한데, 조용히(!) 결혼했더라.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다들 놀랐다. 생활이 전반적으로 결혼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흔 다 되어서 10년 연인과 결혼했다. 10년 연애하는 동안 100번 헤어졌다.(웃음) 현재 결혼 8년차로, 딸 둘이 있다. 창작하는 사람들은 게으르기도 하고, 여행이나 일탈도 많이 해봐야 하는데 그런 일들을 못 해 좀 안타깝다. 결혼 4~5년 때는 음악인으로서, 생활인으로서의 한동준이 상충됐다. 그런데 그 이후엔 내 스타일을 포기하는 게 결혼생활을 위해 좋겠다 싶었다. 이제는 다 포기하고 산다.(웃음)
● 집에서는 어떤 아버지인가.
따뜻한 아빠이고 싶다. 스케줄이 없는 날엔 거의 집에 있다. 딸들이 가끔 저녁에 행사를 나가게 되면, 이상하게 생각한다. “어딜 나가냐?” 그런다. 그래서 술을 먹어도 집으로 불러 먹는 편이다.(웃음)
● 가장으로서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부담감을 얘기했는데, 굳이 뮤지션으로서의 삶을 양보하지 않더라도 음악만 죽도록 하면 경제적 여유도 따라오는 것 아닌가.
그게 세상이 참 희한한 게 그렇게 되면(돈을 벌게 되면) 음악이 별로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만든 음악은 별로다. ‘별로’라는 얘기는 노래가 히트가 되고, 안되고를 떠나 절실함이 없다. 그래야 언제고 들어도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 같다.
● 유독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사랑받는 곡들이 많다. 주옥같은 곡들 중 베스트를 꼽는다면?
김광석씨에게 준 ‘사랑했지만’이다. 김광석씨가 불러서 (잘 됐다는 것은) 그것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 노래 내가 불렀으면, 전혀 안 알려졌을 수도 있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가수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노래도 또 다른 창작이다. 어떤 작곡가들은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 한동준씨도 남들이 보면 꽤 향기있는 가수다.(웃음) 음악과 실제가 다르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많나?
엄청나게 많다.(웃음) 외모도 노래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성격도 그런 얘기를 많이 듣는다. 노래들은 다 분위기가 있는데, 성격은 밝은 편이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니까. 노래라는 것은 거짓말을 못 한다. 어릴 때 심하게 내성적이었다. 그대로 갔으면 자폐아가 됐을 수도 있다. 학교가 30분 거리였는데 걸어다니면서 혼잣말 하고 다니고 그랬다. 내성적인 성격이 남들에게 부담주고 안 좋다는 판단이 서더라. 중학교 23학년 시절부터 스스로 개조하기 시작하고, 노는 친구들과 다니기도 하고 그랬다. 노래 속에 내가 있긴 있다. 분위기 있는 노래 부르면서 사람까지 분위기 있으면 재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평소엔 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 술자리에서 주로 나누는 대화는 뭔가. 아니, 인간 한동준이 음악 외에 관심을 갖는 분야는 뭘까.
사람에 관심이 많다. 세상 돌아가는 거, 책. 경험들…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 살다보면 규칙같은 것들이 보인다. 그것을 심도있게 연구하면 도인이 되는 거겠지.(심각) 사실, 그런 것들이 좋다. 나는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다른 이들은 그냥 쉽게 넘길 수 있는 것들을 심하게 겪는 편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더 많이 아파하고 힘들어한다. 그러다보면 남들보다 더 얻는 것도 있다. 그리고, 꿈이 하나 있는데… 기사화 되긴 쑥스럽지만,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책을 쓰고 싶다.
● 스스로를 ‘언더그라운드 팔자’라고 했다. 얼굴 없는 가수임을 자처하는 것은 아닌가.
(웃음) 여태까지 걸어온 것 보다는 더 적극적인 자세로 살고 싶다. 나는 내 노래가 히트되면 도망가고 싶고, 숨고 싶었다. 왜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에서 많이 떠나고 싶다. 당당하게 대중들 앞에 서서 노래도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공연도 꾸준히 하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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